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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노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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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no_profile 신외숙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2,075회 작성일 2006-11-16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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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도미노의 법칙
신외숙

 
  그녀 나이 서른 살 때의 일이다. 맞선 자리에서 친정 아버지가 말했다.
 
 "제 못난 여식입니다. 제발 잘 봐 주십시오 인물도 배운 것도 없지만 일솜씨 하나는 빠지지 않습니다. 그저 잘 봐 주십시오."

  그녀는 영(靈)이 눌려 말 한마디 못하고 입만 헤벌렸다. 구멍이 숭숭 난 그녀의 정신 속으로 음성이 들려왔다.

  "그저 없는 사람들끼리 혼수니 뭐니 따질 것 있습니까, 그저 건강하게 일 잘하고 자식 낳아 잘 키우고 살면 그만이죠."

  새까맣게 그을은 얼굴에 독기어린 표정으로 남자가 입술을 샐쭉하며 말했다.

  "그래도 격식은 갖추어야죠."

  "격식이랄 것까지야……."

  그녀의 아버지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시골 것들이라고 만만하게 본 게 화근이었다. 그는 노한 듯한 기색이었으나 이내 표정을 고쳐 먹었다.

  "그러니까 제 말은 기본적인 것은 갖추고 나서…… 그러니까 호화 혼수 그런 것 말입니다."

  "그런 것은 저희들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자 남자의 아버지가 말했다.

  "당사자들 마음이 더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는 그녀의 멍청한 표정을 바라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어디서 저런 걸…….
  그의 아버지가 아들의 귓가에 대고 가만히 속삭였다.

  "그저 피박 쓴 셈치고 해 번져라, 엉덩이가 펑퍼짐허니 애 잘 낳고 일도 실허니 잘허게 생겼구나."

  남자는 못마땅했지만 아버지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인물 반반하고 되바라진 시골 처녀보단 낫다. 멍청해도 애 잘 낳고 남편과 시부모 말 순종 잘하는 게 백 번 낫지 싶었다. 저 정도라면 아무리 구박하고 멸시해도 잘 참아낼 것이다. 그녀의 눈은 초점을 잃고 허공을 날았다.

  그날 헤어진 이후 그들은 딱 한번 더 만났다. 결혼식을 앞두고서 비용을 부담하기 위해서였다. 남자 쪽은 한푼이라도 내놓지 않기 위해 애를 썼고 그것은 그녀 쪽도 마찬가지였다.

예물로 금반지 한돈을 해꼈고 혼수로는 시부모와 시증조부 이불 한 채씩으로 대신했다. 신혼여행은 가까운 온천으로 일박하는 걸로 결론을 냈다. 막상 결혼날짜를 받아 놓고 나자 남자의 불만이 대단했다.

  여자의 인물이 형편없다 혼수가 변변찮다 처부모의 인상과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 별별 꼬투리를 다 잡았다. 결혼식 날 이틀 전에는 자기의 부모에게 파혼하겠다는 말까지 했다.

  "여자가 너무 인물이 형편없어 누구헌티 소개도 못 허겠구먼요."

  부모가 나섰다.

  "주제를 알어라 이놈아 인물 반반한 처녀가 너를 좋아할 것 같으냐, 누가 이 촌구석에 와서 층층시하에 농사일하겠느냐구, 그저 여자는 죽어라 엎드려 일하고 시부모 잘 모시믄 그만인 거여."

  남자는 성이 오르는지 한동안 입을 구시렁댔다. 

  "그저 피박 쓴 셈치고 해버려라. 이제 내년이면 니 나이도 사십이다 이거여, 막말로 인물 좋고 반반한 년이 너헌티 시집 오겄냐, 너도 배운 것도 없고 인물 없긴 마찬가지 아니냔 말여, 그리고 너 한가지 꼭 명심할 게 있다. 내가 저쪽에다 니 학력을 고졸이라고 했응께 끝까지 고등핵교 나왔다고 우겨야 된다 알것지."

  "알았어요."

  결혼식은 신랑측의 요구에 따라 고향 읍내 예식장에서 조촐하게 치러졌다. 온 동리 사람들이 모여 잔치 구경하느라 법석이 났다. 그녀는 때가 묻어 시커멓게 변해버린 웨딩드레스를 입고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라 어쩔 줄을 몰라했다. 피로연으로 국수와 돼지고기 떡과 과일 등이 차려졌다. 사람들은 막걸리를 마시며 웃다가 쌈박질이 벌어졌고 잔치는 해가 지도록 이어졌다.

  그녀는 폐백을 드리다 말고 다리에 쥐가 나는 것 같았다. 시부모 시동생 여섯에 다 시증조부모와 증조부의 첩 둘에다가 시처삼촌 시작은아버지 셋에다 시고모 여섯에까지 절하는 데만 한시간도 넘게 소요됐다. 거기에다 해괴한 일은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귀신단지에 대고 절을 하라는 것이었다. 조상귀신 단지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김씨집 38대손 맏며느리로 들어왔다고 조상귀신에게 신고식 하라는 것이었다.

  지루한 폐백이 끝나고 신랑은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술을 병째 들이켰다. 친구들이 짓궂은 농담을 하자 불쾌한 목소리로 "피박 쓴 셈치고 한 거구먼 자식은 봐야 할 것 아닌가."했다.

 그는 읍내에서 백리쯤 떨어진 온천으로 신혼여행 갔을 때도 신부에게 말 한마디 걸지 않았다. 첫날밤은 술취한 신랑이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튿날 시외버스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전날 밤 술이 덜 깨었는지 계속 술주정을 했다.

  "그저 피박 쓴 셈치고 한 것이구먼."

  그녀는 그 말뜻도 모른 체 신랑 눈치만 봤다. 마을버스에서 내린 그들은 동구 밖 논밭을 지나고도 한참을 걸어서야 시집으로 들어섰다. 다 쓰러져 가는 슬레이트집에 펌프가 마당 한가운데 보였다. 장독대에 말린 고추가 보였고 시어머니가 된장을 푸다 말고 그들을 맞았다. 그러자 마당에서 소여물 줄 지푸라기를 썰던 시아버지가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려 신혼여행을 잘 마치고 온 겨."

  그러면서 그는 며느리의 빈손을 보았다. 입꼬리가 올라가면서 표정이 일순간에 변했다. 시어머니의 눈길도 사납게 변했다. 안방으로 들어가자 자리에 누워 콜록대던 시할머니가 그들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입만 웃었다. 지린내가 진동하는 걸로 보아 중풍을 맞은 듯싶었다.

  "어서 할머니께 인사드리거라."

  그녀는 신랑과 함께 날아갈 듯이 큰절을 올렸다. 사랑받고 싶었다. 비록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시집 식구들이었지만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사랑 받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구박만 받고 자라 사랑이 뭔지 정이 뭔지 모르지만 남들처럼 사람 대접받으며 살고 싶었다. 시할머니에 이어 시부모에게도 큰절을 올렸다. 시동생들에게도 맞절을 했다. 그때마다 그들의 입가에선 비웃음이 번졌다.

  "그런데 넌 어째 빈손이냐, 아 신혼여행을 다녀왔으면 하다 못해 할머니 내의라던가 시동생들 손수건 한 장이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니냐."

  시어머니가 노기 띤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는 속으로 아차 싶었다. 그러나 그녀 수중에는 단돈 만원짜리 한 장 없었다. 친정부모가 부조금으로 들어온 돈을 그대로 들고 서울로 가면서 그녀에게는 돈 한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빈손을 내려다보면서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했다. 옆에 있던 신랑이 한마디했다.

  "너희 부모가 돈도 안 주고 서울로 올라간 겨?"

  "네."

  그녀는 모기 만한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뭔놈의 집구석이 딸내미 시집 보내면서 빈손으로 보낸 것도 모자라 신혼여행 가는 딸한테 돈 한푼 안줘 보낸다냐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다냐 너 혹시 친딸 맞냐?"

  신랑이 말하자 시부모는 보기도 싫다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어 시동생들도 나가버렸다. 시할머니만 자리에 누워 눈만 깜뻑거리며 말했다.

  "아가 시집살이 힘들다 생각지 말고 그저 열심히 살거라."

  그녀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러자 밖에서 시어머니의 거친 음성이 들려왔다.

  "아! 뭐하고 있냐 당장 나와서 고추 다듬지 않고."

  마당으로 나가니 시어머니는 가위를 들고 서있었다. 고추를 가운데 잘라 멍석에 깔라는 표시였다.

  "어머니 옷 좀 갈아 입고 나서요."

  그녀는 방으로 들어와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남편은 벌써 밖으로 나가고 없었다. 아마 동네 청년들과 어울려 술을 마실 모양이었다. 그녀는 마당에 내려서자 고추를 다듬고 펌프에 매달려 저녁 찬거리를 씻었다. 저녁을 해 먹고 난 다음에는 온 집안 구석 구석을 청소했다.

그와 같은 일은 시집오기 전에도 늘상 하던 일이었기에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밤이 깊어지는 데도 남편은 들어오지 않았다. 집안에 전화도 없었고 연락해 볼 아무 방법도 없었기에 그녀는 말없이 기다리기만 했다.

  그만 깜빡 잠이 들었었나 보다. 뭔가 옆에서 뒤치락거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그가 눈을 떠 쳐다보자 우악스러운 손길이 그녀의 옷을 벗겼다. 거칠고 난폭한 손길이 그녀의 몸을 무참히 밟고 지나갔다. 그녀는 고통 때문에 실신할 것만 같았다. 뇌리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저런 모자란 년, 저걸 누구에게 줘야할지 모르겠구먼 저게 커서 장차 사람 구실 하게 될지 걱정이여 애물단지가 따로 없지."

  "짐승 같으면 팔아먹기나 하지, 내가 저걸 자식이라고 낳았으니 내가 죄인이여 내
가."

  부부는 가슴을 치며 탄식했다. 중학교 2년을 다니다 말았을 뿐인데 부모는 들어간 돈이 아깝다며 생각날 때마다 돈타령을 했다. 어느날인가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머리채를 잡아들고 마루에 내리꽂으며 악담을 했다.

  "차라리 죽어서 나오지 왜 살아서 나왔냐."

  출생 자체를 저주하는 극언을 내뱉으며 부모는 그녀를 볼 때마다 절망했다.

  반편(半偏).

  그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백치기가 보이는 얼굴에 척추측만증으로 휜 등뼈는 언 듯 곱추를 연상케 했다. 어릴 때 동네 골목길에 나서면 꼬마들이 그녀를 보며 놀렸다. 등에 주먹을 올려놓고 곱추 흉내를 내가면서 죽 모여 서서 웃었다. 한명이 다가와 주먹질을 하면 나머지 아이들도 합세해 몰매를 가했다. 한번은 동네 꼬마들에게 몰매를 맞고 있는데 지나가던 목사가 구해 줘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아이들과 어울려 지내는 것을 좋아했다.

  비록 왕따 당하고 얻어맞아도 또래들과 어울릴 때면 즐거웠다. 고무줄 놀이하고 땅따먹기하고 공기놀이하고…….

  유년시절이 지나고 청소년 시기에는 문밖 출입조차 조심해야 했다. 섣불리 나섰다가 남자에게 붙들려 치욕스런 일을 당할까 염려해서였다. 부모의 눈에 그녀는 도무지 못 믿을 존재였다. 부끄럽고 못난 수치스러운 존재였다. 간혹 집에 손님이 오면 구석방에 처박아 놓고 인사도 시키지 않았다. 그녀의 언니와 남동생은 아예 그녀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엄마 저거 갖다 버려."

  "엄마 저런 걸 왜 낳았어 그냥 갖다버리지."

  "아빠 저거 밖에 못 나오게 해 누가 볼까 창피스럽단 말야."

  부모는 넉넉한 살림임에도 그녀에게만큼은 한사코 인색했다. 거지 동냥 주듯 사람 흉내만 내게 했다. 초등학교 다닐 때의 일이다. 그녀는 반 친구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그 친구는 언젠가 그녀가 아이들에게 몰매를 맞을 때 구해준 목사의 딸었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심성이 여리고 착한 그애는 유독 그녀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그날도 집에 가면 맛있는 음식이 있다며 그녀의 손을 잡아 끈 것이다.

  그날 그녀 눈에 본 친구의 집안은 완전 별천지였다. 목사 부부는 딸에게 사랑을 아낌없이 부어 주었다. 사랑스런 눈길로 바라보면서 온갖 덕담과 칭찬을 했다. 더불어 딸의 친구인 그녀에게도 친절을 다했다.

  "이왕 왔으니 맛있는 것도 실컷 먹고 잘 놀다 가거라. 뭐 갖고싶은 것 없니? 있음 말해라."

  사실 가지고 싶은 건 많이 있었지만 그녀는 말하지 않았다. 왠지 그랬다간 큰 후환이 닥칠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이 사준 선물을 들고 문설주를 넘었다간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았다.

  "이 거지 같은 년아 누가 너더러 이런 것 얻어 오랬어? 거지냐 왜 남에게 이런 것 얻어 오냐구?"

  언젠가 길거리에서 만난 남자가 꼬마인형을 사주길래 들고 왔다가 엄청난 욕설과 함께 머리채를 쥐어뜯긴 일이 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아무리 좋은 물건을 주어도 절대로 받지 않았다. 부모는 그녀의 모든 욕구를 절제시켰다. 아니 처음부터 욕구 자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먹을 것 입을 것 꼭 필요한 물건조차 주지 않으면서 남에게 얻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녀에게는 욕구 자체가 없어야 했다. 결코 갖고 싶은 물건이 있어도 먹고 싶은 게 있어도 발설하면 안 되었다.

  주는 대로 먹고 없으면 굶어야 했다. 그녀에게는 욕구 자체가 죄악이었다.

  "아뇨 없어요."

  부부싸움이 있는 날이면 그녀는 양쪽으로부터 곤욕을 치렀다. 부모로부터 동시에분풀이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너 나한테 공짜로 시집 온 거 아냐?"

  언제 잠에서 깨었는지 남편이 말했다. 그녀는 안 그래도 멍청한 눈을 멀뚱멀뚱 뜬 채 입만 오물거렸다.

  "그게 무슨……."

  "너 나한테 시집오면서 쓴 돈이 도대체 얼만 줄 아냐? 그나저나 너 니 집에서 친딸 맞냐?"

  그녀는 아직도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눈만 꿈뻑였다.

  "니가 나한테 시집오면서 쓴 돈이 총 오만원이다 알았냐? 알았음 어서 나가서 밭에 가 일해 빚 갚아야 될 거 아냐?"

  "빚이라뇨?"

  "너하고 선보느라고 서울 올라 다녔지, 예식장비 치렀지 신혼여행 경비 부담했지 돈이 한두 푼 든 줄 아냐?"

  세상에 친정부모만 인색한 줄 알았는데 남편은 한술 더 떴다. 겨우 초등학교 졸업장 하나에다 가진 건 층층시하에다 논밭뙈기 몇 개뿐인 주제에 그는 아내 알기를 집안에서 부리는 일꾼 정도로 알았다. 그녀는 집안일은 물론 세상에 태어나 한번도 해본 일 없는 농사일까지 그야말로 뼈가 부서지도록 일만 했다.

  시할머니 대소변 받는 일부터 시작해서 시동생 치다꺼리에다 그녀는 소처럼 머슴처럼 일만 했다. 가끔씩 시할아버지가 사는 읍내에까지 가서 노력 봉사했다. 시할아버지는 꽤 많은 재산을 이미 첩에게 물려주고 있었다. 나이 팔십에 아직도 정정한 그는 오십도 안 된 애첩에게 파묻혀 갓 시집온 손주 며느리를 종 부리듯 했다.

  그녀에게 복이 있다면 타고난 건강 체질이라는 것이었다. 만삭이 다 된 몸으로 아무리 힘든 일도 척척 해냈다. 동네 마실 한번 못 다니면서 시집올 때 진 빚을 갚기 위해 총력을 다했다. 아들 둘에 딸 하나가 태어났다. 그녀는 목숨을 다해 아들 딸을 사랑했다. 어릴 때 받지 못한 사랑을 아이들에게 원없이 쏟았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면 십 리 밖에 있는 읍내는 물론 시외버스를 타고 나가서라도 꼭 사주었다.

  가을 걷이가 끝나가던 어느날이었다. 친정부모의 부음이 들려왔다. 함께 외국여행 나갔다 오는 길에 자동차 사고를 만나 급사한 것이다.

  남편과 함께 친정에 도착했을 때 이상하게 분위기가 썰렁했다. 전혀 초상집 분위기 같지 않게 냉랭했다. 조문객도 보이지 않았고 빈소 앞에 향불만 타오르고 있었다. 언니와 남동생은 이미 재산분배를 끝내 놓은 상태였다. 친정은 살고 있는 집만 해도 억대가 넘은 만큼 꽤 규모가 컸다. 그 외에도 시장에 작은 상가 건물이 있었고 시골에 임야도 여럿 있었다. 그러나 그녀 몫으론 아무 것도 없었다.

  이유는 부모의 유언이라는 것이었다. 재산을 남겨줘 봐야 관리할 능력이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 말을 들은 남편은 초등학교밖에 못 나온 까막눈임에도 분통을 터뜨렸다. 은근히 한몫을 기대했던 것이 날아가자 그는 절망하다 못해 아내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병신 같은 년, 제 부모 살아서도 대접 한번 제대로 못 받더니 죽고 나서도 그 꼴이구나."

  그는 주먹을 휘두르다 말고 처형과 처남의 입가에 머무는 비웃음을 보았다. 멸시와 천대의 눈길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것을 그도 알아 챈 것이다. 그는 깊은 절망감을 느끼며 더욱 아내를 학대했다. 집 문밖만 나가면 세상 인심은 혼자 다 쓰고 다니는 그였다. 친구들 술 사주고 밥 사주고 노름빚 대주고 동네 경조사 일은 혼자 나서서 챙겼다. 그러다 수틀리는 일이 발생하면 아내에게 모든 분풀이를 다했다.
  이게 다 내가 네년을 잘못 만난 탓이여. 재수없는 년.

  그녀는 피하지도 않고 매를 고스란히 맞았다. 아들 딸이 지켜보는 데서 남편은 주저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아들이 주먹을 휘두르면 시부모는 모르는 척 딴청을 부렸다. 아니 때에 따라서는 옆에서 부추기기도 했다.

  "오죽하면 제 친정부모가 빈손으로 시집을 보냈을까, 남들은 며느리가 시집올 때 바라바리 싸들고 와 혼수자랑 하느라 난리인데, 저것은 친정부모가 죽어가면서도 단돈 십원 한 장 남겨준 게 없으니, 오죽하면 그랬을까."

  은근히 기대했던 바가 무너지자 더 화가 난 것이다. 친정부모는 죽어가면서도 그녀에게 상처를 남겼다. 아랍권의 나라에서는 신부가 시집갈 때면 엄청난 액수의 지참금을 가져가야 한다. 만족한 액수를 가져가지 못할 때는 학대와 고문 심지어 죽임까지 당한다. 열아홉 살 난 처녀가 시집가면서 지참금을 부족하게 가져갔다 해서 임신한 몸임에도 시아버지와 시동생에 의해 불에 태워졌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쉬쉬하던 그들도 마침내 밝혀진 수사결과 앞에 침묵을 지켰다. 그녀의 죄는 여자로 태어난 거였다. 그래서 중동 지방에서는 딸이 태어나면 즉시로 죽이거나 어느 정도 자라면 팔아먹는 관습이 있다. 벅찬 혼수비용을 감당하지 못해서이다. 태국에서는 아들보다는 딸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딸이 태어나 십 년쯤 자라면 사창가에 계약을 맺고 팔아 넘긴다.

  이제 초등학교에 다닐 그녀들은 짙은 화장을 하고 사창가 골목을 누비며 남자를 유혹한다. 에이즈의 위험 속에 무방비로 방치된 채 인생 막장을 향해 달리는 것이다. 중국 연변을 떠도는 탈북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꽃제비로 불리는 여자 탈북자들은 인신매매단에게 팔려 성노리개로 전락한다. 열일곱 살 된 어린 꽃제비는 농가에 팔려가 세남자의 성노리개가 되었다. 아버지 아들 둘에게 번갈아 가며 성폭행 당하다가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을 시도했다. 그랬다가 이번에는 중국 공관원에게 붙잡혀 북송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중국에는 철저하게 산아제한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가족 일 자녀가 법으로 제정돼 있다. 단 소수 민족에 의해 두 자녀가 허용된다. 때문에 임신 중에 성감별이 행해져 여자 아기들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지 않은 경우엔 딸로 출생되자마자 병원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산모가 아이를 버려둔 채 도망치는 경우도 있다.

  살아남은 딸아이를 백일도 되기 전에 팔아 넘겨 버리는 경우도 있다. 팔리운 아이들은 커다란 가방 안에 든 채 여기저기 다시 팔리기 위해 돌아다니다 끝내 질식사하는 사태도 발생한다.

  최근 우리나라 어느 산부인과에서는 9개월 된 태아를 임신중절 시킨 극악무도한 사건이 보도된 적이 있다. 이제 막 출생을 앞둔 딸아이를 단지 여아라는 이유로 태아를 갈가리 찢여서 죽인 것이다. 의사의 양심상 도저히 숨길 수 없었다는 산부인과 의사는 그 후유증이 심각해 다시는 중절수술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죽임 당한 태아의 영혼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남편은 걸핏하면 술을 마시고 처자를 괴롭혔다. 못 배우고 못나고 무능한 한풀이를 처자에게 다 쏟아붓는 것이었다. 영어 단어 한마디 할 줄 모르는 그는 열등감이 극심했다. 남들 앞에 나서면 주눅이 들어 말 한마디 못하면서도 생색내는 일만큼은 빠지지 않고 했다. 돈 내는 일이 있으면 항상 제가 먼저 나서서 계산을 했다. 처자식이야 굶어죽든 말든 상관치 않았다. 논에 김을 매다가도 동네 사람이 지나가면 얼른 뛰어가 인사하면서 술대접을 했다.

  그렇게 인심을 쓰고 다니는데도 어쩐 일인지 그에게는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었다. 워낙 인상이 불량한데다 술만 취했다하면 꼬장을 부리기 때문이다. 그날도 아마 그런 날이었을 게다. 읍내 술집에서 거나하게 취한 그는 2차로 노래방을 갔다. 함께 어울려 노래 부른 것까진 좋았는데 학력 이야기가 오간 것이 화근이었다. 농촌이라 해도 모두 고졸이었다. 국졸은 그 한사람뿐이었다.

  되지도 않는 영어노래를 부르는 게 심사가 꼬였던 모양이다. 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일행 중 한명이 말했다.

  "계산 니가 할 거지?"

  그러자 그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니가 해라."

  "얌마 니가 해, 나 돈 없어."

  "왜 꼭 나만 하란 법 있냐 많이 배운 니들이 해라."

  "짜식 자격지심은……."

  "뭐여? 자격지심."

  그 말이 화근이 되어 그는 새벽까지 싸웠다. 한번 울분이 터지자 걷잡을 수 없었다. 새벽까지 싸우다 지친 그는 힘없이 경운기를 몰았다. 전신에서 피곤이 몰려왔다. 꾸벅꾸벅 잠이 절로 쏟아졌다. 그때였다. 마주 달려오던 승용차가 헤드라이트를 강하게 비쳐왔다. 경적과 함께.

  끼이익! 하는 마찰음과 함께 정신이 한꺼번에 달아나는 것 같았다.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승용차의 앞 범퍼가 경운기를 그대로 들이받고 만 것이다. 엄청난 굉음이 그의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그가 탄 경운기는 논으로 그대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잠시 후 경운기는 콰쾅! 하며 불길과 함께 논 한가운데서 흉물로 변했다. 끔찍한 죽음이었다. 아니 처참한 죽음이었다.

  사고차량은 보험에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것도 자기 차량이 아닌 이제 막 등록한 렌터카였다. 시부모는 땅이 꺼지는 것처럼 통곡하더니 며느리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넌 서방이 죽었는데도 어째 눈물 한방울이 없냐, 모자란 년이 이제 보니 독하기까지 하구나, 저러니 제 서방을 잡아먹었지."

  남편상을 치르는데 모든 화살이 그녀에게 와 닿았다.

  남편 잡아먹은 년.

  시부모는 아예 그녀 얼굴 대하는 것조차 싫어했다. 장례식을 치르자마자 당장 집에서 나가라며 호통을 쳤다.
  내가 뭘 어쨌길래.

  그녀의 내부에서 처음으로 분노가 치솟았다. 평생 주눅들어 살다가 처음으로 느끼는 분노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 분노조차 표현할 힘이 없었다.

  사람들은 약자 앞에서만 분노를 표출한다. 강자 앞에선 분노도 힘을 잃는다. 
  도대체 내가 뭘 어쨌길래 저리 야단인가. 남편이 음주운전 한 것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음주운전 한 남편을 내가 죽이다니 도대체 이런 얼토당토한 말이 어디 있단 말인가. 사고를 낸 승용차 운전자는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 끝내 눈을 감았다. 그에게는 단 한마디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긴 죽은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장례식의 긴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그녀는 천하에 몹쓸년이 되어 갖가지 수모를 다 견뎠다. 시동생 시누이들은 그녀를 아예 죄인 취급했고 시부모는 눈앞에서 얼쩡거리는 것조차 싫어했다. 결혼식 이후 처음 얼굴을 내민 언니와 남동생은 부조금만 내밀고는 이내 사라졌다. 그들은 언제 마련했는지 새까만 외제 승용차를 타고 있었다. 옷매무새도 얼마나 세련됐는지 문상객들 중에 눈에 확 띨 정도였다.

  더러운 이물질이라도 묻을 새라 서둘러 떠나면서 그들은 미망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녀는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죽음이라는 형식이 너무도 거추장스럽고 복잡했다. 죽는다는 건 산자에게 너무 많은 희생을 요구했다. 죽음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복잡하고도 미묘한 것이었다. 죽으면 모든 게 끝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슬픔이니 고통이니 그런 단어는 아예 떠오르지 않았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더 힘들다더니 그 말이 꼭 맞았다. 죽음은 산자에게 많은 짐을 지우고 나서 청승스럽게 떠나갔다. 동네 뒷산에 있는 선산에 파묻고 와서야 그제서야 죽음의 실체가 느껴졌다.

  아들의 죽음에 충격을 입은 시부모는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시동생들은 모두 객지로 뿔뿔이 흩어져 살다가 시집 장가를 갔다.
  그들은 돈 들어갈 일이 아니면 절대로 연락하지 않았다. 시부모 제사 때도 빈손으로 와 먹다가 갔다. 조카들 용돈 한번 주는 일이 없었다. 그녀는 자식들을 위해 파출부 공장일 등 가리지 않고 했다. 자신을 위해서는 단돈 십 원 한 장 쓰지 않았다. 그녀에겐 욕구 자체가 없었다. 아이들은 성장해서 도회지로 떠났다. 그때까지 그녀는 구십 살이 넘어 백수를 바라보는 시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중풍 맞은 노인네의 생명이 끈질기게 연장전을 달리고 있었다. 씨앗을 본 남편은 이미 사망해 저 세상 사람이 된 지 오래인데 시할머니는 끈질기게 생명줄을 붙잡고 있었다. 그녀는 다 떠나버린 집안에서 매일 시할머니와 사투를 벌이며 살았다. 그녀의 소원은 하루라도 마음 편히 살아 보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차려주는 밥상에 앉아 식사하는 것도 그녀의 작은 바램이었다.

  그녀는 노인네 구완하랴 돈벌이 다니랴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다. 객지에 나가 있는 자식이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선물하겠다는 말에 그녀는 세찬 도리질을 했다.

  "난 괜찮다. 너희들만 잘 되면 그만이다."

  "엄마 정말 갖고싶은 것 없어?"

  정말 그녀는 자신의 욕구 자체를 모르는 듯했다. 마음이 정상적인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옷도 몸빼 차림으로 때묻은 것만 입었고 먹을 것도 늘 거칠고 싼 것만 먹었다. 아니 그녀는 음식을 돈주고 사먹는 건 생각지도 못했다.

  언젠가 한번 읍내 음식점에서 동네 아낙네가 짜장면을 사주자 황송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누군가 물 한잔만 건네주어도 작은 친절에도 고마워 절절 맸다.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보면서 어떤 뿌듯함을 느꼈다. 강자로서의 여유와 승리감을 느꼈다. 어느날 큰딸이 결혼할 남자를 데리고 왔다. 그녀는 사윗감 앞에서 황송해 절절 맸다. 엄마 왜 그러냐고 딸이 말했지만 자신의 처지가 부끄러워 한마디 말도 못했다.

  "애비도 없이 키우느라 그저 부끄럽습니다."

  "엄마!"

  딸은 분노를 터뜨렸다.

  "그저 딸 가진 죄인입니다."

  딸은 창피스럽다며 남자의 팔목을 붙잡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작은아들은 툭하면 나타나 돈을 요구했다. 팔뚝과 얼굴에 난 생채기를 보이며 합의금을 주어야 한다고 했다. 돈이 없다고 하면 그대로 폭력을 행사했다. 아들은 아버지를 그대로 빼어 닮았다. 씨도둑은 못한다는 말이 꼭 맞았다. 수중에 돈 한푼 없으면서 남에게 생색내는 일만큼은 빠지지 않고 했다.

  남의 빚보증을 섰다가 사기꾼으로 몰려 곤욕을 치른 일도 있었다. 온 동네가 떠들썩한 사건을 두고서 그녀는 심장병을 일흐켜 자리에 눕고 말았다. 아들은 그렇게 보증 서주는 일을 좋아했다.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안 되면 어머니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겼다. 밑 빠진 독에 물붓기였다.

  그녀는 지치지도 않고 일을 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죽어라 일만 했다. 그러는 동안 딸은 결혼해 집을 떠나갔고 큰아들은 군대갔고 속썩이던 작은아들 역시 이듬해 군대로 가 몸을 숨겨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생전 나타나지도 않던 시동생들이 몰려와 재산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을 쳤다. 그녀가 피땀 흘려 가꾸던 논밭 중 일부가 택지 개발로 선정되었다는 것이다. 아들 둘은 이미 군에 가 있고 딸에게 상의하자니 들어줄 것 같지도 않았다.

  딸은 그녀가 나타나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남편은 물론 시집식구들이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일년 내내 가야 전화 한번 없는 딸이었다. 시동생들은 그녀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저 큰소리치고 윽박지르면 순순히 내놓으리라 생각했다. 겁 많고 까막눈 수준인 그녀가 무얼 알랴 싶었다. 남편에게 얻어맞고 학대당하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심지어 자식들에게조차 외면당하는 그녀 처지를 그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눈만 껌뻑이던 그녀가 못 내놓겠다고 말했을 때 그들은 아연실색했다. 전혀 바보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좋은 말로 할 때 내 놓으쇼 확 불을 싸질러버리기 전에."

  시동생은 부엌에서 식칼을 들고 와 눈앞에 들이대며 위협했다.

  "차라리 죽여번지쇼 죽었음 죽었지 못 내놔요."

  "왜 못 내놔? 왜?" 

  시동생은 화가 나는지 집 뒤란으로 돌아가더니 큼직한 돌을 들어 냅다 항아리를 깼다. 쨍그랑 소리가 귓전에 들려오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귀를 막으며 몸서리를 쳤다. 남편이 살아 있어도 저랬을까. 처음으로 남편의 부재가 실감났다. 시동생은 몇 번 구시렁대더니 그날은 일단 그렇게 돌아갔다.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힘센 어깨들을 대동하고 나타난 것이다. 

  "정선이한테 해꼬지 하기 전에 곱게 내놓으쇼."

  정선이는 그녀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었다. 서울로 시집 간 이후 어쩌다 명절에 발 그림자만 비출 뿐 고향에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친정엄마의 생일은 물론 삼촌들에게도 생전 전화 한번 없었다. 그런 조카를 두고 시동생은 해꼬지를 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이었다.

  "정선이년 사는 집구석에 찾아가서 확 뒤집어엎어 놓고 말 테니까."

  돈에 환장한 그는 악마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딸에게 해꼬지 하겠다는 말에 그만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래 다 가져가거라. 그깟 것 내가 가지고 있는다고 해서 내 팔자가 변하는 것
도 아니고 다 가져 가거라."

  땅문서를 건네 든 시동생은 곧바로 노름방으로 달려갔다. 처음에는 재미를 보는 듯하더니 곧 장소를 바꿔 게임장으로 향했다. 항간에 유행하던 바다이야기에 푹 빠진 것이다. 모든 악의 종말이 그러하듯이 그 역시 얼마 안 가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그후 그는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돈지랄하더니 원도 한도 없겠구먼."

  그녀는 시동생이 또다시 나타나 행패를 부리면 어쩌나 늘 불안에 떨었다. 불안은 마약처럼 사람의 뇌를 손상시키는 기능을 한다. 불안은 마음의 지옥이며 불행의 원초이다. 

  어느날 온몸에 뼈마디가 녹아나는 것 같더니 속에서 울렁증이 일었다. 정신이 산만하게 얼클어지면서 자꾸만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자꾸만 물었다.

  너는 누구냐?
  너는 누구며 어디서 왔느냐?
  너는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가.

  그녀는 방바닥에 누워 자신에게 물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일까? 나는 왜 이렇게 살아가는 걸까?

  마음의 갈등이 심해질수록 속에서 꾸역꾸역 슬픔과 설움이 올라왔다. 찢어지고 상한 마음이 억장이 무너지듯 절망감으로 들려왔다. 생각해 보니 그녀는 세상에 태어나서 사랑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누군가 사랑을 표현한다 해도 그것을 사랑의 감정으로 받아들일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또 생각해 보니 언제 사람 대접받고 살아본 적이 있었나 싶었다.

  이날 입때껏 자신의 욕구도 모르고 짐승처럼 일만 하며 살아온 자신이 아니었던가. 그녀는 갑자기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시집오기 전 동네 다방에서 맞선 보던 생각이 났다. 집에서 키우던 짐승 팔 듯 딸을 놓고 흥정하던 친정부모가 떠올랐다. 딸의 행복과 그들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아니 귀찮은 짐 떼네 듯 그들은 딸을 멀리 쫓아낸 것이다. 눈에 안 보이는 아주 먼 곳으로.

  어느날 TV를 보는데 기가 막힌 장면이 보였다. 인도의 어린이들이 노동자로 팔려 돌산에서 험한 노동을 하는 장면이었다. 아이들은 특별한 보호 장구도 없이 슬리퍼에 돌가루를 마셔가며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들이 먹는 음식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아침 저녁 주먹밥 한덩이가 고작이었다. 어린 나이에 아직 부모의 품에서 뛰어 놀 나이에 팔려 잠자는 시간 외에는 온종일 중노동에 시달리는 것이다.

  자식을 중노동 현장에 팔아먹은 부모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기자가 마이크를 들이댔을 때 아이들은 천진난만한 눈빛으로 말했다.

  "엄마 아빠는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놀아요."

  여기에는 무슨 이유로 팔려왔느냐는 질문에 아이들은 모른다고 대답했다. 팔려온 아이 중에는 젖먹이도 있었다. 언니 오빠가 노동 현장에 나가고 나면 아이는 온종일 울다가 늦은 저녁 때 가져온 밥풀로 연명한다. 아이들은 극심한 노동과 돌가루를 너무 많이 마신 탓으로 하나 둘 쓰러져 죽어간다. 이유도 모른 채.

  양탄자 공장에 팔려 간 아이들은 발목이 쇠사슬에 묶인 채 하루 18시간 이상 중노동에 시달린다. 발목을 묶은 이유는 혹시나 도망칠까 염려해서다. 이제 네 다섯 살 아이가 도망치면 어디로 가겠는가. 자기를 팔아치운 부모에게로 가면 또다시 팔릴 텐데. 아이는 노동도구가 되어 팔리고 서서히 사람들의 외면 속에 죽어간다.
  지옥이 따로 없다.

  세상에 신(神)이 있다면 왜 그런 광경을 목격하고만 있는가. 기자는 그 기막힌 상황을 설명하면서 성경구절을 소개했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씨앗 뿌리기가 끝나가던 어느날이었다. 소식이 끊겨 안심하고 사나 싶었는데 시동생이 악귀처럼 찾아왔다. 봄비가 부슬부슬 담벼락을 적시는 초저녁이었다. 시동생은 흡사 몰골이 영화에 나오는 흡혈귀 같았다. 며칠밤을 세웠는지 새빨간 눈알이 잔뜩 핏발이 서 있었다. 그는 혼자 사는 형수 방문을 거칠게 열어 제키더니 대뜸 욕설부터 퍼부어 댔다.

  "돈 내놔라. 이 시러베 같은 년아, 안 내놓으면 집구석에 확 불을 싸질러버릴 텡께."

  그는 방구석에 세워진 빗자루를 들더니 형수의 얼굴에 냅다 집어던졌다. 그러더니 방 한가운데 있는 밥상을 들어 그대로 바닥에 내다 꽂았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식칼이 들려져 있었다. 그녀는 너무 놀라 벌벌 떠느라 말도 나오지 않았다. 생전에 남편의 모습이 꼭 저와 같았다. 처자식을 개패듯이 패고는 종국에는 꼭 밥상을 뒤집어엎었다.

  "빨리 안 내놔 그럼 정선이년 집에 찾아가서 개망신을 줄 테다."

  한번 재미를 보더니 또 써먹을 작정인 모양이었다. 시동생은 죽은 제 형을 꼭 빼어 박아 포악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무식한 주제에 눈은 다락같이 높아 꼭 예쁜 차자만 원하다가 결혼도 나이 삼십 중반에 했다. 그것도 나이 어린 처녀를 강제로 덮쳐서 할 수 없이 성사된 케이스였다. 그러나 그는 아내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술만 마시면 주먹을 휘두르는 바람에 보다 못한 처부모가 딸을 강제로 이혼시키기에 이르렀다. 아내는 이미 집을 나가 다른 남자와 살고 있었다.

  시동생은 꼭 하는 짓마다 악마를 닮았다. 생긴 모습도 범죄형으로 혐오스러운 인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딜 가나 배척 당하고 제대로 된 일자리 하나 얻지 못했다. 그러다 만만한 형수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거기에만 가면 돈이 나올 것 같았다. 더구나 그가 아는 형수는 겁이 많고 거의 백치 수준이 아니던가.
  적당히 겁을 주고 으름장을 놓으면 돈을 내놓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그의 오산이었다.

  "없다, 이놈아! 차라리 날 죽이고 가라, 난 이제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녀는 시동생의 바지 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밥상에서 흘러내린 김치 국물이 옷을 적셨다. 한참을 뒹굴며 울부짖던 그녀의 손끝에 식칼이 잡혔다. 그녀는 그 칼을 들고 시동생의 눈앞에 들이댔다.

  "그래 죽여라, 이놈아 니 목숨이 질긴지 내 목숨이 질긴지 한번 해보자, 너 죽고 나 죽자."

  쥐도 코너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다. 악이 바친 그녀는 이판사판으로 달려들었다. 시동생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죽은 송장 취급하며 마구 하대하던 형수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어디서 이런 배짱이 생긴 걸까.

  "부모 복 없는 년 서방 복도 없고 자식 복도 없다더니…… 죽은 서방놈이 살아 돌아온들 이만 못하랴, 그래 차라리 죽여라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은 인생이다."

  그녀는 나오는 대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마구 지껄여댔다. 그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식칼을 방 한가운데로 내리 찍었다. 정말이지 그녀는 그 순간 인생을 끝장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더 이상 살아봐야 무슨 좋은 일이 있겠는가. 바닥에 엎드려 한참 넋두리를 하고 우는데 시동생은 어느새 줄행랑을 치고 없었다.

  다신 찾아오지 않겠지 생각했는데 웬걸? 시동생은 그후에도 몇 번인가 찾아와 행패를 부리고 갔다. 돈을 안 주니까 나중에는 배가 고파 죽게 되었으니 밥 사먹을 돈 달라고 했다. 그래서 몇 번 주고 나니까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시동생이 객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노름빚에 몰리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여러 사람 괴롭히고 못된 짓만 일삼더니 결국 파국을 맞은 것이다. 뻔한 결말 앞에 그녀는 목놓아 울었다. 슬픔과 허망한 생각이 끝도 없이 일었다. 인생을 그렇게 무의미하게 악으로 살다간 시동생이 불쌍하단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태어나서 남의 가슴에 못박고 악행만 저지르다 간단 말인가. 객사한 탓일까. 모두 쉬쉬하며 서로 눈치만 살폈다.

  시신은 거적대기에 싸여 화장장으로 옮겨졌다. 마지막으로 형제들이 모여 그 광경을 지켜봤다. 유골은 선산에 뿌려졌고 그들은 모두 다시는 안 볼 것처럼 헤어졌다. 귀찮은 혹 하나 제거한 것처럼 모두 시원한 표정이었다. 시동생의 죽음은 한마디로 개죽음이었다.

  그녀는 시동생의 죽음을 치르면서 회한에 찬 슬픔을 느꼈다. 남편의 죽음이 많은 짐을 남기고 떠났다면 시동생의 죽음은 차라리 축복처럼 여겨졌다. 누구 하나 나서서 눈물을 흘리거나 아쉬워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죽음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 모양이었다. 한 사람이 죽었다 해서 온 나라가 떠들썩하고 법석인 경우가 있는가 하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죽음을 당연히 하는 경우이다.

  시동생의 초상을 치른 지 한달쯤 되던 날이었다. 법원에서 소장이 날아들었다. 집이 경매에 붙여진 것이었다. 법 문제 있어 문외한인 그녀는 놀라서 어안이 벙벙했다. 집뿐만이 아니었다. 몇 남지 않은 땅과 전답이 모두 경매에 붙여졌다.

  살다 살다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 살면서 온갖 풍상을 더 겪은 그녀였지만 그때만큼 황당한 적도 없었다. 그때 그녀는 작은 아들이 제대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어느새 제대한 아들이 집에는 올 생각도 않고 곧바로 친구 집으로 갔다가 빚보증을 서준 것이다. 알고 보니 그 친구는 이미 사는 집조차 경매에 붙여져 오갈 데 없는 신세였다. 그래서 작은 사업이라도 시작하려고 하는데 밑천이 없자 그것을 작은 아들이 대신 서준 것이었다.

  작은 아들의 생각에 어머니는 안중에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는 늘 천대의 대상이었다. 어머니의 입장을 배려하거나 두둔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는 항상 그렇게 살아야 하는 존재인 줄 알았다. 때리면 맞고 구박하고 외면해도 말 한마디 못하는 그런 존재였다. 작은 아들은 이제 마지막 남은 어머니의 모든 삶의 근거를 빼앗아 버리고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이제 그녀는 그야말로 먹던 죽그릇마저 놓아야 할 형국이 되고 말았다. 아들은 어디로 숨었는지 감감 소식이었다.
  인간들이 죄다 나 하나 죽이려고 용을 쓰는구만.

  그 순간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죽을 결심을 했다. 삶 자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지옥훈련이었다. 한번도 팔자가 뒤바뀌어지지 않는 인생이었다. 세상에는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던데 왜 난 이 모양인가. 온몸의 뼈에서 우두둑하고 마찰음이 났다. 이젠 몸을 움직이는 게 죽기보다 싫어졌다. 죽을 고생해서 돈을 벌어봐야 밑빠진 독에 물붓기였다. 또다시 마음속에서 탄식소리가 들려왔다.

  반편. 반편. 반편. 그와 동시에 마음속에서 어리석은 질문이 또 떠올랐다.
  인생은 무엇 때문에 사는가.
  도대체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무거운 짐이 마음을 비수처럼 찔렀다. 무슨 놈의 팔자가…….

  살고 있던 집과 전답을 모두 처분했는데도 빚은 다 메꿔지지가 않았다. 작은 아들은 그 빚 외에도 또다른 사람에게 빚보증을 선 게 잘못돼 이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처분할 게 없어지자 그는 쫒기는 신세가 되어 집 근처에는 얼씬도 안 했다. 이제 그녀도 며칠 있으면 살던 집에서 나가 노숙자 신세가 될 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평안했다.

  폭풍전야와 같은 그런 이상한 평화였다. 하도 반복되는 불난을 겪고 보니 세상에  무서울 게 없어진 것인가.
  이젠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도 없구먼.

  자리에 누워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잠시 후 뒤란으로 갔다. 장독대 뒤에 숨겨 두었던 낫을 꺼내 들었다. 그것을 숫돌에 정성껏 갈기 시작했다. 시퍼런 날이 손에 섬뜩한 감촉으로 전해져왔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날을 더 정성껏 갈았다. 손등 위로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나같은 무지렁이 팔푼이는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는 거여.

  그녀는 더욱 힘을 주어 날을 갈았다. 낫은 번뜩이며 죽음의 유혹을 재촉했다. 이젠 다 끝난 거여. 날에 물을 뿌려 정성껏 닦은 다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에 들어와 흰 보자기를 꺼내 낫을 싸매고는 자리에 누웠다.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무수히 치도곤을 당하고 있었다. 몸이 사방으로 찢겨져 나가는 것 같았다. 엄청난 공포가 혼을 압박하면서 팔 다리가 해면체처럼 움직였다. 그 흐느적거리는 육신이 긴 블랙홀을 통과하고 있었다. 허리가 뒤로 꺾이면서 사방에서 귀가 찢어질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짐승과 귀신의 울음소리였다. 아! 이곳이 바로 지옥이구나. 악귀가 뱀의 형상을 하고서 사방에서 몰려왔다.
  그들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소리쳤다.

  "이게 바로 너의 마지막 모습이다."

  공포에 질린 혼이 마지막 숨을 토하는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나타나 그녀의 혼을 받쳐 주었다. 안전하고 튼튼한 팔이었다. 능력과 권세가 무한한 그 팔이 그녀를 안아서 다시 위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위로 올라 갈수록 빗줄기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블랙홀을 빠져나가는 순간이었다. 빛이 온몸을 감싸면서 그녀 눈앞에 길이 나타났다.

  수정같이 맑은 길가에서 아이들이 뛰어 놀고 있었다. 천사도 보였다. 양 날개를 가진 천사들이 그룹을 지어 날고 있었다. 가지각색 꽃과 과일나무도 보였다. 아이들이 과일을 따먹으면서 그녀에게도 건넸다. 그들은 합창을 부르고 있었다. 맑은 음률이 마음에 들려오면서 힘이 나기 시작했다.

  노래는 어느새 평안과 기쁨으로 가슴을 채우기 시작했다. 맑은 물소리도 마음속으로 들려왔다. 그러자 마음을 옥죄고 있던 짐이 조금씩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나타나 그녀의 짐을 대신 져주었다. 그건 아주 강력한 힘이었다. 그 힘이 그녀를 점점 자유하게 했다.

  그녀의 귓가에 음성이 들려왔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

 꿈에서 깨어난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 늦은 아침을 먹고 났는데 우체부가 누런 서류봉투를 들고 문 앞에 서 있었다.

  "등기 왔습니다. 도장 가지고 나오십시오."

  등기라니…… 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만 봐도 놀란다더니 그녀는 심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봉투 겉면을 보니 수신인이 여동생으로 되어 있었다. 생전 연락 한번 없던 동생이었다. 살다보니 별일도 다 있다 싶었다. 봉투를 개봉하고 보니 안에서 서류 한뭉치가 나왔다. 그건 까막눈인 그녀가 보기에도 큰돈이 될만한 것이었다.

  "이 이게 도대체 뭔 물건이래요?"

  그녀가 돌아서는 우체부를 향해 물었다. 우체부가 자전거를 타다 말고 도로 내려섰다.

  "이거 상가 건물 등기 이전 서류 아닙니까?"

  "등기 이전이라뇨?"

  "아주머니 명의로 되어 있는대요."

  "뭐 뭐라구요?"

  정말이지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었다. 그녀는 방으로 뛰어 들어가 당장 여동생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그동안 연락을 끊다시피 살았기 때문에 전호번호를 찾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신호가 가는 데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분명 핸드폰 번호가 있을 텐데 그녀는 알지 못했다. 포기하고 돌아서는데 벽력같이 전화벨이 울렸다.

  때마침 여동생의 전화였다. 여동생은 대학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한 걸음에 달려간 그녀 앞에 여동생은 완전 중환자의 모습이었다. 자궁을 들어내는 대수술을 받은 지 일주일째 접어들었다고 했다. 안색이 새까맣게 변해버린 여동생은 그래도 핏줄이라고 눈물을 글썽이며 손을 내밀었다.

  "언니 그동안 미안했어."

  세상에 태어나 여동생으로부터 처음 듣는 언니 소리였다.

  "어쩌다 어쩌다 이렇게 큰 수술을 받고…… 내가 미안하구나, 그동안 찾아보지도 못하고 하나뿐인 여동생인데."

  "미안하긴 다 내 잘못이지 뭐."

  예감이 불길했다. 동생이 이렇게 나오는 데는 뭔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것이다. 여동생은 침대 모서리를 붙잡고 간신히 일어나더니 말했다.

  "언니 상가 건물 등기 이전 서류 받았지."

  "으응 그런데 그게 어떻게 된 거니?"

  "응. 엄마가 돌아가시기 한달 전쯤 언니에게 전해 주라고 내게 맡겨준 거였어, 우
리 애 아범이 하도 욕심을 내는 바람에……."

  여동생은 한숨을 쉬고 나더니 말했다. 자신의 본심은 진작 전해주고 싶었지만 남편이 욕심을 부리는 바람에 늦어졌다는 것이었다. 그 말이 핑계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눈물이 났다. 갑자기 생긴 거금보다 육친의 정에 마음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그 육친의 정이 마음에서 몸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보다도 주혁이가 찾아 왔었어."

  주혁이는 빚보증 서주는 것 좋아하다 집안을 완전히 말아먹은 그녀의 작은 아들이었다.

  "주혁이가 왜? 너한테 또 돈 내놓으라고 행패라도 부린 게냐?"

  그녀는 지레 겁이 나서 물었다. 죽은 남편의 망령이 아들을 통해 또다시 재현되려는 것인가.

  "그게 아니고 외항선 타러 떠난다고."

  "뭐? 외항선?"

  외항선이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사실은 언니 살던 집 전답 다 날아가게 되었다는 것 주혁이 통해 들었어 그래서…… 그 서류 언니한테 보낸 거였어."

  그제서야 알 것 같았다. 그런데 아들이 무슨 마음으로 그런 말을 이모에게 하고 떠난 것일까. 천하에 못된 망나니 아들이.

  "주혁이가 뒤늦게 철이 든 모양이야, 자신은 더 이상 엄마 볼 면목도 없다면서 돈 벌러 떠날 테니까 이모가 엄마 좀 도와 주면 안 되겠냐고. 나도 큰 수술 앞두고 결심한 거야, 애 아범 모르게 빨리 넘겨주자고. 언니 그거 처분해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편히 살아, 이건 내 부탁이기도 하고 돌아가신 부모님 부탁이기도 해."

  그녀는 점점 얼굴이 붉어졌다. 감정이 이반 현상을 일흐키고 있었다. 어색하고 낯선 감정이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치며 일어났다. 그건 그녀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것은 마치 속임수처럼 그녀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평안하면서도 따듯한 기운이 가슴속에서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그녀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탈피를 결심했다.


  학대는 도미노 현상과 같다. 한사람이 학대하면 다른 사람들도 나서서 학대한다. 초등학교에서 흔히 일어나는 왕따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요즘 어린아이들은 못생긴 아이들과는 같이 놀아주지도 않는다. 힘없고 연약한 아이들일수록 왕따 대상이 된다. 가장 만만하고 상대하기 쉽기 때문이다. 얼짱 몸짱은 어린아이들이 더 따진다. 젊고 늙은 것도 아이들이 더 먼저 안다.

  유치원만 해도 젊고 예쁜 여선생이 아니면 아이들이 싫어해 채용대상에서 제외된다. 힘없고 못생긴 아이는 또래들에게 외면당해 유치원을 떠나던가 성형수술대에 올라야 한다. 병아리장에 환자가 발생하면 상처 난 부위를 놓고 온 병아리떼가 모여들어 쪼아댄다. 병아리는 병 때문이 아닌 동료 병아리에 의해 더 빨리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사람이건 짐승이건 약자는 피해당사자가 되기 쉽다.

  약자는 피해자가 됨과 동시에 학대의 대상이 된다. 학대는 한사람으로 시작해 곧 우후죽순식으로 주변으로 파급된다. 마치 도미노 현상처럼.
  한 가정에서 아버지가 어머니를 학대하면 아들도 딸도 며느리도 사위도 덩달아 학대한다. 사람들은 약자를 미워하고 학대한다. 강자 앞에서는 주눅들고 아부하면서도 유독 약자에게만 분노와 학대를 발산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상대적 입장에서 강자와 약자의 위치가 늘 바뀌는 것임에도 약자를 미워한다.

  그것이 바로 악한 인간 본성이다.

  학대받고 자란 사람은 자신을 스스로 학대한다. 자존감을 잃고 감정의 기능을 상실한다. 더 나아가 판단능력도 상실하고 만다. 마음과 생각이 기능성을 상실한 채 혼미를 거듭하는 것이다. 그의 영(靈)은 두려움에 묶이고 자신이 당한 상처를 고스란히 대물림함으로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그러나 그녀는 달랐다. 자신의 아픔을 모두 혼자 끌어안았다. 상처로 인한 마음의 짐을 아무에게도 나누지 않았다.

  일평생 당한 학대와 상처를 자식들에게 보상받으려 하지도 않았다. 사무친 원한과 분노, 절대자에 대한 극한 절망감까지 그녀는 모두 혼자 끌어안았다. 남의 도움 따위는 결코 기대하지 않았다. 혼자 죽도록 일해서 살림을 일구었고 상처로 인한 마음의 짐도 혼자 떠안았다. 짐이 무겁다고 힘들다고 발설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실로 거대한 십자가의 짐이었다. 마음속에서 짐승의 울부짖음이 들려와도 그녀는 혼자 괴로워했다.

  그녀는 백수를 앞두고 있는 시할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것도 앰뷸런스를 타고서. 죽음을 목전에 둔 시할머니를 결코 외면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집안에서만 모시던 시할머니를 노인전문병원에 입원시켰다. 사람들은 쓸데없는 짓 한다며 조롱했지만 그녀는 듣지 않았다. 시할머니는 병원출입이 난생 처음이라 했다. 링거병을 팔뚝에 꽃은 채 만족한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넌 복받고 살 거다."

  "제 나이가 몇인데요."

  "아직 환갑도 안 됐으니 살날이 많이 남았지 않니? 앞으론 복 받으며 살 거다."

  시할머니는 이상하게도 청력 하나는 좋았다.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고 듣고는 그녀에게 세세하게 들려주었다. 시골에서 살 때도 주야장창 방안에 누워지내면서도 언제 누가 와서 전해 주었는지 모르지만 온 동리의 소식을 다 꿰뚫고 있었다. 시할머니는 몸만 불편할 뿐 마음은 태평이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모두 그녀를 미워하고 학대하는 데도 시할머니만큼은 예외였다.

  자신의 오물을 치워주는 손주 며느리의 손길을 잊지 않고 있었다. 워낙 오랜 세월을 병고에 시달린 탓인지 시할머니의 병세는 차도가 없었다. 아니 점점 위중해져 갔다. 그러함에도 정신은 더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남들 같으면 치매 증상이 올 나이였다. 시할머니는 죽음을 앞두고 그녀에게 말했다.

  "내가 지금까지 산 것도 다 네 덕분이다. 고맙구나."

  그 말에 그녀는 오열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는 그때까지 세상에 살면서 그런 말은 처음이었다. 그건 칭찬과 위로이자 최초로 듣는 인정의 말이었다. 마음속의 원한이 눈 녹듯이 사라지면서 평안이 생겨났다.

  다음날 시할머니는 아무 고통 없이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첫눈이 내려 온천지가 새하얗게 변해버린 초겨울날이었다. 시할머니의 부고를 듣고 나타난 시집 식구들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생전 가야 돈 한푼 내놓지 않던 그들이 장례식에 나타나서는 봉투를 내밀며 미안한 웃음을 보였다.

  "그동안 고생 많았수, 우리 할머니 평생 자리보전하고 사시느라 고생 많으셨지만 형
수가 더 고생이셨지 우리도 다 안다구요."

  시동생은 계면쩍은지 구둣발로 바닥을 긁으며 말했다. 시누이도 그녀의 손을 맞잡더
니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큰아들은 결혼할 여자를 데리고 나타나더니 어머니를 잘 모셔야 한다며 미리 다짐을 받기도 했다. 상황이 백팔십 도로 달라져 있었다. 시할머니를 선산에 안장하고 오던 날 그녀는 새로 산 아파트 거실에 폭 고꾸라지며 울었다.

  지난날 겪었던 설움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좋은 세월 온갖 풍상으로 다 떠내려보내고 이젠 쇠약해진 육신만 남았다. 큰며느리는 그녀에게 고분고분 잘했다. 그것이 진심이 아니란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며느리는 남편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게 분명했다. 시어머니 명의로 등록된 상가 건물이 그들의 최종목표라는 걸 그녀는 나중에야 알았다.

  작은 아들도 외항선 타던 걸 그만두고 귀국했다. 처음에는 때아닌 효자 노릇을 하더니 어느 순간엔가 태도가 돌변해 어머니에게 사업자금을 대 달라고 했다. 상가 건물을 담보로 사업자금을 대주면 두 배로 갚아 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시는 남의 빚보증 서주는 일 따위는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 눈에는 작은 아들이 다시 옛날 버릇이 발동한 것으로 보였다. 그녀는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다. 순간마다 옛날의 기억이 리바이벌 되면서 피해의식에 시달렸다.

  무의식속에 자리잡은 상처가 고개를 내밀면서 노이로제 증상마저 일었다. 현관에서 벨소리만 나도 불안에 떨었다. 생각 같아서는 상가 건물을 처분해 아들들에게 나누어주고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마저 쉽지가 않았다. 두 아들이 서로 자기가 갖겠다고 우겼기 때문이다. 어느날 그녀는 분노 띈 음성으로 말했다.

  "어차피 나 죽고 나면 니들 몫으로 갈 텐데 그만들 하거라."

  영(靈)이 쇠하고 지쳐가던 어느날이었다. 그날도 그녀는 무거운 돌덩어리를 마음에 지운 채 거리로 나섰다. 그런데 갑자기 환시 현상이 일었다. 길거리를 오가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서 피가 보였다. 가슴 중앙에서 피가 샘솟듯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등뒤로 커다란 돌덩어리가 매달려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사람들은 모두 가슴에 피를 흘린 채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서로를 향해 미움과 상처의 불화살을 쏘아대고 있었다. 가슴에서 피가 펑펑 솟아오르는 것도 모른 채. 

  사람들은 미워하고 학대하면서 서로에게 마음의 짐을 지우고 있었다. 사람에 따라 짐의 무게와 형태는 각각 달랐지만 모두 눌린 채 헉헉대고 있었다. 마치 인도에 있는 어린 아이들이 돌산에서 중노동하는 듯한…….

  가슴이 무너져 내리면서 그녀의 의식에  환한 불빛이 비쳐왔다.
  그래 바로 그거야.

  결심한 듯 그녀의 발걸음은 가벼워졌다. 그녀는 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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