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인을 가이드하는 정신박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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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이월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5건 조회 1,768회 작성일 2007-05-28 14:18본문
이 월란
두 사람이 팔짱을 끼고 걸어오고 있다. 한 사람은 한 손에 든 지팡이를 좌우로 흔들며 눈을 감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I am Sam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그 Sam처럼 입술을 과장되게 실룩거리면서 팔자걸음으로 걸어오고 있다. 맹인을 가이드하는 정신박약자, 그는 모퉁이를 돌 때 맹인을 배려하지 못했다. 맹인의 허벅지가 책상 모서리에 부딪혔고 손등이 긁혔다. 그래도 맹인은 억세게 끼인 팔짱을 뿌리치지 않았다.
부모가 되는 법도, 엄마가 되는 법도 배운 적이 없는 또다른 지체부자유자인 난 내게 팔짱을 끼인 청맹과니같은 내 아이를 그렇게 끌고 다녔는지도 모른다. 어려서 앞이 보이지 않는 아인 그랬었나보다, 세상은 너무 높아요, 엄마. 저를 이끌어 주세요. 어느 날 밤, 난 정말 소경처럼 두 눈 꼭 감고 잠든 아이를 붙들고 울었다. 자는 아이의 허벅지엔 파란 멍꽃이 피어 있었고 손등은 긁혀 피가 굳어 있었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나도 그 아일 배려하지 못했다. 아인 그 생채기들을 평생 안고 살아갈 것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노인네 뼈마디 쑤시듯 그 아인 다리를 절룩거릴지도 모른다. 긁힌 손등 위에 짠 눈물방울이 떨어져 아려와 몸소름이 돋을지도 모른다.
무지하다는 건 때론 폭력이다. 어리석다는 건 모진 슬픔이다. 그렇게 아프고, 생채기를 내고서야 앞이 보이게 되고, 깨닫게 되고, 정상인이 될 수 있다는 건 참으로 잔인한 단 한번의 인생이다. 한번 모태를 떠나오면 유턴도, 추월도, 후진도 허락되어 있지 않은 삶의 일방통행로에서, 그래서 걸어온 길마다 오돌도돌 돋아난 흉터들이 손 끝에 늘 만져진다는 건......
내일은, 이제 몇 달 후면 내 허락 없이도 신용카드에 사인을 할 수 있고 시집도 갈 수 있는 성인이 되는 그 아이와 키재기를 할 것이다. 새끼손가락 마디의 반의 반이라도 엄마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거울 속에서 확인할 때마다 등붙인 엄마의 엉덩이가 엎어지도록 밀어내며 팔짝 팔짝 좋아라 했던 그 아이이게, 세상은 이 엄마에게도 높고 높은 담이었다고 말해주리라. 그 아일 꼭 껴안고 그렇게 꼬옥 말해주리라.
2007.5.27
댓글목록
금동건님의 댓글
금동건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그 아이에게 세상은
이 엄마에게 높고 높은 담이었다고
말해주리하
그 아일 꼭 껴안고 그렇게 꼬옥 말해주리라
좋은글 뵙고갑니다
목원진님의 댓글
목원진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축하합니다. 이제 곧 예쁜 성인이 한 사람 등장하시게 되니,
참으로 자연스럽게 억지 없는 알기 쉬운 표현으로 멋진 서사시를
보여주셨습니다. 공감을 하면서 그럼요, 하면서, 여기서도 "애들은
어버이의 등을 보며 자란다."라고 곧잘 말 합니다. 이월란 시인님의 분신은
손색없는 사회인이 되시리라는 보지 않으면서도 그러한 선입감을 품고 있습니다.
한편, 이세들에 과분한 기대는 보이지 않는 무거운 짐을 얹게 되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저의 지나온 어리석은 자녀 교육의 맹신은, 애들이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너무도 잘 보여주었었습니다.
이순섭님의 댓글
이순섭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아름다운 모정이 새록새록 피어나고 있습니다. 부모의 심정을 아이들이 반 만이라도 알아주었으면 좋으련만, 아이들의 심정을 부모들이 10분의 1 정도라도 알아주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유년시절 딸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세계를 깔끔하게 처리한 2006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김명희 시인님의 `개성집`을 소개해 드립니다.
내 유년에 가까운 곳에는 개성집이라는 술집이 있었다.
늙은 작부 하나가 있었고 아버지 부랑의 날들이 있었다.
붉은 입술에 검은 점
저녁이면 문득 툇마루 끝에 걸리던 속살 속의 노을
개성집은 우리들의 적이었다.
밤이 깊으면
낡은 송학표 주전자가 시끄럽게 장단을 이끌어주던
검은 루핑 지붕 밑에서 아버지는 몇날 며칠을 머물렀다.
아교처럼 단단한 아버지의 편력은 여름내 계속되었고
그럴 때 마다 나는 어머니에게 떠밀려 그곳을 들르곤 했다.
돌아오는 길엔 누깔사탕과 은전 한 잎이 내 안으로 넣어졌고
나는 사탕이 다 녹기도 전 어머니에게 들러댈 붉은 변병들을
입 안 한켠에 감춰야만 했다.
그.게.슬.픔.인.지.모.르.고
어린시절 내 슬픔 가까운 곳엔 개성집이라는 유곽이 있었다.
아카시아는 밤마다 멀미처럼 부풀어 올랐고
저녁의 라디오 속에선 붉고 격양된 노래들이 꽃잎처럼
쏟아져 나왔다.
조팝꽃이 끝나면,
한 낮의 길엔 양산을 쓴 여인 하나가 가볍게 스쳤고
그런 날 어머니의 가슴은, 해가 지고 오랜 뒤에도
쉽사리 저물지 못했다.
심사위원 : 김 수 열
최승연님의 댓글
최승연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높은담은 헐어야 하는데 쉽지 않지요?
항상 좋은글 주시는 시인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박영춘님의 댓글
박영춘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이월란 시인님
좋은 글 주심 감사합니다
늘 밝은 사진 속의 모습이
아름답게 뵙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