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과 삼천 궁녀는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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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홍갑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10건 조회 2,371회 작성일 2005-08-11 22:00본문
사람들아!
660년 7월 18일
이렇게 더운 날
나는 끌려갔다.
당나라로,
*북망산천으로,(北邙山)
羅 唐의 연합군에 짓밟힌 백제 역사
조선 중기 이후 문인 묵객 임진왜란 나라 잃고
줄줄이 이어져 일제 치하 망국 설움
의자왕(義慈王) 시제 삼고 삼천 궁녀 안주 삼아 읊고
백제를 두번 죽인
문인들
시인들
호사가들,
2.
금강 어귀 *구드레 나루 *留王山,
의자왕 태자 효 만이천팔백칠명의 포로,
백제 유민들,
의자왕 옷자락 부여잡고 울었다.
꺼이 꺼이 슬피 울었다.
그중
목놓아 울다 죽은 절세가인(絶世佳人) 한 사람
제일 많이 울었던 한 사람
"삼천이란" 이름 가진
어여쁜 궁녀
어여쁜 낭자
어여쁜 계집애
어여쁜 가시내!
궁녀였던 것이다.
3.
문인들아!
시인들아!
호사가들아!
너희는 삼천 궁녀만치 울어 본적 있는가?
백제인 만치 울어 본적 있는가?
홀로 한 사람!
삼천 궁녀만 울었다.
*백제 유민이 울었다.
사람들아!
"나는 호색가(好色家)가 아니다!"
"나라 잃은 못난 왕이다!"
*의자왕과 삼천 궁녀 원혼을 달래며...
*북망산 北邙山 : 중국 허난성 낙양洛陽 북쪽에 있는 작은 산
귀인 명사들의 무덤이 많은곳 (의자왕도 이곳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됨)
*구드래나루: 백마강 부여에 있는 나루 의자왕 당나라 배 타고 마지막 이별한 나루
*留王山 : 부여 백마강 어귀에 있는산 (의자왕이 이곳에 포로들과 머물다 끌려간 곳) 부여군 양화면 원당리에 있는산
* 백제 유민 : 흩어져 남은 힘 없는 백성
댓글목록
박기준님의 댓글
박기준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농되어 침채된 눈물이 시인님의 고약으로 확! 뽑히는 후련함.
그 후련함에 가식 뒤집어 쓰고 뛰어 들랍니다.
낚시 가셔서 참천궁녀의 응고된 눈물 낚으시어 놀래지나 않으시련지 ....... 쩝,
즐거운 어복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박기준님의 댓글
박기준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참, 어복상은 이민홍시인님 드리시와요, ㅎㅎㅎ
홍갑선님의 댓글
홍갑선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박기준 시인님 언제 부여 관광 한번 동행 하시지요
전설이 참 많아요 백제의 슬픈 역사 많이 왜곡 되었어요
서해로 낚시가서 중국 허난성 낙양 바라보겠습니다. 원래 삼천명의 궁녀는 없었답니다.
의자왕 그당시 나이가 60을 갓 넘었어요 그만한 궁녀 거느릴 궁궐도 없고 정력도 없었어요
궁녀중에 삼천이란 이름 가진 궁녀 한 사람 있었답니다.
건필하소서
배상열님의 댓글
배상열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홍시인님, 노래미 많이 낚으시고 시도 많이 낚으십시오.
이선형님의 댓글
이선형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엣적에 민물낚시를 좋아했지요 바다 낚시를 해보고 싶었는데
언제 한 수 배우렵니다. 배시인님 말씀처럼 시도 많이 낚으십시오.
김태일님의 댓글
김태일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홍갑선 시인님, 역사에도 관심이 많군요.
아하, 그렇군요.
삼천명의 궁녀가 백마강을 향하여 몸을 던진 것이 아니라,
삼천이라는 궁녀가 몸을 던진 것이군요.
그런데 홍시인님,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낙화암에 가 보면, 백화정이라는 정자가 우뚝 서 있던데,
그 정자를 일제치하에 일본놈들이 세웠다면서요?
홍시인님, 그 정자 뜯어내고
우리 기술로 새로 지으면 안될까요? ^^
홍갑선님의 댓글
홍갑선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김태일 시인님 맞는 말씀입니다 또한 백화정에서 강 건너 멀리 보이는 마을이 저희 고향 이지요
지금 구 부여 박물관도 일본 풍으로 지어 졌어요 요것도 없애야지요
지금은 백제식 박물관으로 부여 시내 금성산성 밑에 세워 졌어요
일본 역사는 백제 역사다. 일제 치하에 왜놈들이 친일파들이,알량한 문인들 시인, 작곡가 들이
근세에 들어서 많이 왜곡 해 놓았어요 바로 잡아야 할 백제 역사랍니다.
배상열님의 댓글
배상열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삼천이라는 궁녀가 몸을 던진 것이 아니라, 후세에 그렇게 왜곡이 된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조선 후기에 그렇게 된 줄로 아는데, 이후에 [삼천궁녀 몸을 던진 낙화암에서....] 운운하는 대중가요 덕분에 거짓사실이 급격히 전파되었지요.
김석범님의 댓글
김석범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시인님의 답글에 깊이 귀를 귀울이며 ...역사의 왜곡은 이제 고쳐가야지요..!!
김영태님의 댓글
김영태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역사의 왜곡은 사실보다 더 사실적으로 받아 들여지는 것 같습니다
홍 시인님의 좋은 글 앞에 머물다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