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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밤의 어린시절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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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홍완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2건 조회 1,352회 작성일 2008-01-10 23:52

본문

                      어린시절이 그리운 겨울밤의 추억

  겨울이 되면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더 생각나는 것 같다.
흰 눈송이라도 날리는 날이면, 여지없이 내 마음은 고향집 사랑방으로 달려간다.
바같마당으로 난 창호지 바른 창문을 열고, 펑펑 쏟아져 내리는 흰 눈을 한없이 바라보곤 하였다.
바람이 차거워 더 이상 방문을 열어 놓을 수 없게 되면, 손가락에 침을 발라 낸, 방문구멍을 통해 내다보곤 하였다.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던 나는 어린 시절의 많은 시간을 사랑방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지냈다.
이렇게 추운 겨울밤이면, 아랫묵 따뜻한 이불속으로 나를 끌어들여 안아 주시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뭉클해 지곤한다.

  나는 충청도 첩첩 산골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지조 있는 양반 집안, 할머니의 영향으로 불교성향이 깊은 집안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풍류도 있으셔서 농사를 지우시면서도 일 년에 몇 차례씩 친구 분들을 집으로 초청하셨다.
음식을 대접하시면서 시를 읊으시고 청사를 노래하셨다.
할아버지께서는 술을 드시지 못하시는데도 친구 분들이 참으로 많으셨다.
외출을 하실 때도 그러하셨지만 평상시에도 의관을 흐트러지게 하시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대문 앞에는 할아버지께서 손수 쓰신 “예절”이라는 팻말이 언제나 붙어 있었다.
나는 장남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면서 자랐다고 한다.
잠잘 때는 항상 나를 데리고 주무셨다.
나는 어릴 적에 몸이 약했었는지 밤에 자다가 자주 깨어서 울면서 보챈 기억이 난다.
그럴 때에도 나를 엄마한테 보내지 않고, 바깥마당을 향한 사랑방 문을 열고
“자꾸 울면 호랑이한테 물어 가라고 한다.”라고 하시면서 몇 시간씩 나를 안고 달래던 기억이 난다.
저수지에 방울낚시를 가실 때나 원두막에 가실 때도 데리고 다니셨다.
낚시터에 가서는 할아버지께서 낚아 올리시는 살아서 펄펄뛰는 붕어를 보는 것이 정말 신기하고 신이 났다.
어떤 때는 지루하여 잠이 오면 할아버지의 옷으로 베개를 만들어 주시면서 자게 하여 주셨다.
낚시에 따라가서 나를 기쁘게 하는 또 하나는 점심을 먹는 것이었다.
 엄마가 할아버지께 정성들여 싸주신 맛있는 도시락을 먹는 것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다려지고 맛이 있었다.
이렇게 잡아온 붕어로 조모께서 호박을 넣고,
붕어 탕이나 붕어찜을 만들어 할아버지의 저녁상에 놓아 주셨다.
나는 거의 항상 할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하였기 때문에 할아버지께서 드시는 맛있는 반찬을 먹었다.
지금도 그때의 붕어찜과 붕어탕 맛을 잊을 수 없다.
요즘도 어쩌다 민물고기 음식점 옆을 지나갈 때에는 그때의 추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곤 한다. 
할아버지와 함께하였던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 생각나는 것은 물론이다.
내가 나이가 좀 더 들자 할아버지께서는 나를 이십 리나 떨어져 있는 홍성읍내 장에도 데리고 다니셨다.
장에 가는 날이면 그 먼 거리까지 쌀을 한 말씩 지고 갔지만 신이 났었다.
장에 가는 길에 철길도 구경할 수 있었다.
간혹 운이 좋은 때에는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볼 수도 있었다.
그리고 더욱 신나는 것은 평소에 먹어 보지 못한 찐빵도 사주시고,
칼국수나 고기가 들어 있는 국밥도 사주시는 것이었다.
장에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할아버지께서 장을 보신 짐을 지고 오지만 무겁지 않게 느껴졌다.
그 짐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탕이나 과자도 있었고,
할아버지의 상에 오를 생선, 김 등 맛있는 반찬거리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다 운이 좋아 마차를 만나 마차 뒤에 걸터앉아 돌아오는 날에는
그야말로 그 기분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가 있겠는가!
장에서 집에 돌아올 때쯤에는 보통 해가 저물어 어두워진다.
이렇게 할아버지와 내가 늦게 오는 날에는 조모나 엄마가 횃불을 들고,
동네 모퉁이까지 마중을 나오시곤 하였다.
이렇게 마중 나오시어서 우리가 돌아오는 기척을 들으시면 멀리서 소리를 치셨다.
엄마가 마중을 나오신 때에는 “아버님이세요?”라고 하셨다.
할머니께서 나오신 때에는 “거기 완표냐?”라고 하셨다. 
이처럼 마중 나온 횃불 빛을 보고 할머니나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그 반가움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나의 어린 시절은 우리나라가 어렵게 살던 50년대와60년대였다.
내가 살던 곳에서는 사탕같은 단 것이 귀하였다.
가끔 할아버지께서 자물통이 잠긴 궤짝을 열고, 사탕을 꺼내 주시곤 하였다.
그게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께서 멀리 외출이라도 한 날이면, 그 궤짝을 몰래 열고,
내 딴에는 표시가 나지 않게 한 개씩 꺼내 먹은 적도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그것을 모르실 리가 없으셨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 일을 가지고  한 번도 꾸지람을 하신 적이 없었다.
내가 궤짝을 열기 위해 헐렁거리게 만들어 놓은 열쇠걸이를 그저 다시 단단히 고정시켜 놓으실 뿐이었다.
할아버지 보물 궤짝의 열쇠고리가 단단히 고정되어 열수 없을 때는
깜깜한 다락으로 기어 올라가곤 하였다.
그곳에는 할머니께서 엿을 고으시기 위하여 사다 놓으신 설탕봉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설탕도 있었고 흑설탕도 있었는데, 흑설탕이 더 맛이 있었다.
할머니께서 떡을 만드시면, 떡을 흰설탕에 푹 찍어 먹기도 하는데 정말 맛이 있었다.
어떤 때는 밥을 설탕에 비벼 먹기도 하였다.
여름철 한창 더운 날에 땅속에서 퍼 올린 차거운 물로 설탕물을 만들어 마시면
그렇게 달고 시원할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매년 겨울에 고구마, 무우 등으로 엿을 고시곤 하였다.
그냥 떡을 찍어 먹는 엿도 만드시고, 구기초 등을 넣고 할아버지를 위하여 약엿을 다리실 때도 있었다.
이럴 때면 부엌의 할머니 옆에서 아궁이에 불도 지피고,
엿이 만들어 지고 있는 솥 안을 주걱으로 젓기도 하였다.
할머니는 엿을 만들 때 설탕을 뚬뿍 뚬뿍 솥 안에 부어 넣으시곤 하였다.
골에서의 설탕의 용도는 참으로 다양하였다.
내 단것에 대한 욕구를 채워주는 것도 그 용도중의 중요한 한 가지 였을 것이다.

  다락에 기어 올라가면 깜깜하기 때문에 더듬더듬 기어가서 밖으로 향한 다락문을 열어 놓는다.
그 문을 통하여 다락에 빛이 들어오면 설탕봉지를 찾는 것이다.
설탕봉지를 찾으면, 손으로 쥐어서 한 입이 될 때까지 입에 넣는다.
설탕이 한 입 가득차면 오몰오몰 설탕을 씹으며 단맛에 취해간다.
너무 많이 먹으면 할머니한테 혼이 날까봐, 이번 한입만 먹고 그만 먹어야지 하고 입에 설탕을 한 입 채우지만,
한 입 다 먹고 나면 다시 손이 설탕 봉지 속으로 들어가곤 하였다.
이렇게 설탕을 먹고 나면 설탕봉지가 어느 자리에 있는지 다시 눈여겨 둔다.
왜냐하면 다음에 올라왔을 때 찾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눈여겨 놓아도 어느 때는 할머니께서 다락을 정리하시면서 설탕봉지를 다른 곳으로 옮겨 놓으실 때도 있다.
그럴 때면 그것을 찾느라고 다락에 있는 온 봉지며, 항아리들을 뒤지곤 하였다.
어느 날 운이 좋은 때는 이렇게 다락을 뒤지다가 횡재를 만날 때도 있었다.
할머니께서 작은 항아리에 보관하여 두셨던 홍시나 꿀이나 엿병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홍시는 대부분 잘 익어 있어서 분홍색 말랑말랑한 것이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것이었다.
얼마나 달고 맛있었던지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입에 침이 감돈다.
꿀과 엿은 설탕보다도 훨씬 달고 맛이 있었다.
처음에는 손가락으로 찍어 먹다가 나중에는 수저를 가져와 퍼 먹는다.
꿀은 맛은 있었지만, 한 번에 많이 먹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할머니께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실 때 꿀 먹은 벙어리에 대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다.
꿀을 많이 먹으면 벙어리가 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꿀을 먹을 때는 늘, 혹시 많이 먹으면 벙어리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하였다.
이렇게 다락에서 단맛에 취하여 있다가 내려 올 때는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하여 정리를 잘 하고 내려온다.
내 딴에는 흔적을 남기지 않겠다고 하였지만, 할머니께서 그것을 모르실 리가 없으셨을 것이다.
할아버지처럼 귀여운 손자의 몰래 설탕 사냥을 즐거움으로 보고 계셨을 것이다.
완전범죄를 위해서, 다락에서 내려 올 때 다락 외창도 원래대로 닫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락 외창을 닫으면 깜깜하여 지기 때문에 엉금엉금 더듬거리며 기어서 방으로 내려오곤 하였다.
그렇게 설탕이나 꿀을 실컷 먹고 나면 한 동안 단것이 먹고 싶지 않곤 하였다.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까지 나를 보실 때마다 항상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
“완표야, 너는 커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항상 어른들에게 예의바르게 말하고 행동하도록 하여라”
할머니는 나한테 뿐만 아니라 식구들 앞에서 늘 이렇게 말씀하시곤 하였다.
“완표야, 너는 너무 착해. 어른들과 친구들에게 늘 친절하게 해라. 그러면 커서 큰일을 하는 사람이 될거야”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오래 전에 천국에 가셨지만, 지금도 고향집에 계신 것 마냥 내 마음속에 살아 계시고 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에 대한 어린 시절의 추억과 격려의 말씀은 50중반에 들어선 나를 어린 시절로 되돌리곤 한다.
그럴때마다 마음이 한달음에 고향산천으로 달려가 살구꽃이 만발한 마당에서,
진달래꽃이 만발한 뒷동산에서,
흰 눈이 펑펑 쏟아지는 텅 빈 얼어붙은 논 바닥위에서 뛰놀게 한다.
앞으로 태어날, 내 손자녀에게 안겨 줄 아름다운 추억거리와 오래 간직하게 할 말을 생각한다.
내가 그러한 준비를 할 때가 된, 세월의 흐름에 감사한다.
아름다운 추억과 소중히 간직할 말을 들려줄 손자녀의 탄생을 생각하면 마음이 설렌다.

매섭게 추워진다는 일기예보다.
눈내리는 고요한 겨울 밤이다.
아침에는 마당 목련나무가지에
수줍은 듯이 소복이 앉아있는
하얀 눈을 볼 것같다. 
내일은 차를 가져가지 말고
전철을 타고가야 겠다.
전철역에서 연구실까지 눈쌓인 길을 걷고 싶다.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설렌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소중하고,
아름다운 어린 시절의 추억이
추운 겨울밤을 따뜻하게 덥혀 주고 있다.

                              2008. 정초
                                                      牧山  眞賢

   
추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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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한미혜님의 댓글

한미혜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추억이 많은 사람이 가장 부유한 사람임을
깨닫는 요즘 입니다.
많은 지난날의 생활을
다시금 상기시켜주심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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