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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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이순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2건 조회 2,675회 작성일 2011-05-10 21:29본문
인물과 사물
이 순 섭
우리의 책장에는 한 번도 펼치지 않은 책이 빽빽이 꽂혀있다.
나는 어제까지 살아있는 사람
오늘부터 삶이 시작되었다.
입김으로 뜨거운 음식을 식힐 수도 있고
누군가의 언 손을 녹일 수도 있다.
바람은 언제나 삶의 가장 허름한 부위를 파고들었고
그래서 우리의 세월은 더 부끄러웠다.
비가 내리는 파밭은 침침하다.
문득, 썩지 않는 것이 있다.
나무 밑 떨어진 이파리들은 모두
누군가 한 번쯤 신었던 흔적이 있다.
오랜 공복의 胃, 넓고 메마른 허기를 본다.
저 불은 끌 수 없다.
달력 뒷장을 읽는다.
독한 럼주 병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들판의 지표면이 자라는 철
모든 라벨은 사심이 없지
한 결 같이 청렴하다네.
꿈꾸듯, 한 편의 오래된 우화(寓話)가 소녀의
동공 깊숙이 스며든다.
한 낮의 외출에서 돌아가는 나무들의 모습이 어둑하다.
몇 층의 구름이 바람을 몰고 간다.
매니큐어 칠을 한 손톱 안엔
내 손톱을 장악한 한 남자가 살고 있다.
작은 아버지 바지가 걸린 바지랑대 사이로 푸석한
골목이 보였다.
연대기를 알 수 없는
검은 책이다.
태어나 최초로 걸었다는 산길을 돌아
재활용 쓰레기 더미 위에
죽부인이 누워 계신다.
사원식당 앞 은단풍나무
쇠죽 쑤는 저녁이었다.
생각이 뚜벅거리며 TV속으로 들어가요
그것은 선명한 결을 잘 익힌 맛이다.
여름밤 내내 팔거천만 돌고 또 돌았습니다.
갈 때까지 갔다는 말을
안녕이란 말 대신 쓰고 싶어질 때
야채 썩는 냄새가 고소해지면
장터는 복숭아처럼 익는다.
* 2011년 신춘문예 당선 시 첫 행을 인용함.
댓글목록
허혜자님의 댓글
허혜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감명 깊게 감상하였습니다.
김영우님의 댓글
김영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 평화를 빕니다.
이순섭 시인님,! 잘 지내시죠 ,
항상 좋은글 많이 발표하시어 문우인의 귀감이 되심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