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를 물고 날아간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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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이월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5건 조회 1,378회 작성일 2008-05-27 14:46본문
고요를 물고 날아간 새
이 월란
뒤뜰로 난 크낙한 창, 한 줌의 시간은 블라인드 사이로 겨울나무 가지마다 초록 발자국을 남기고 떠났다. 세월이 남기고 간 내 몸의 흔적도 저 블라인드 사이로 죄다 보일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진실의 깊이를 짚어내진 못한다. 대지는 메말라 쩍쩍 갈라지는데 상식은 늘 물 위에 떠 있다. 두 발 꼿꼿이 정박해 있는 섬이어야 했다. 수위에 따라 오르내리며 어지럽게 출렁이다 표류하는 난파선. 난 헤엄을 칠 줄 모른다. 바람은 미쳐가고 있다.
어제는 저 창 가득 회오리가 머리채를 흔들었고 오늘은 터질 듯 고요하다, 적막하다. 풍력 계급 0의 바람이 없는 상태. 10분간의 평균 풍속이 초속 0.0~0.2미터이며 육지에서는 연기가 똑바로 올라가고 바다에서는 수면이 잔잔하다는 그 고요. 들꽃의 정수리 위에 떨어뜨린 저 한 점의 고요로도 세상은 맑아지리라 꿈꾸던 내 어린 날은 새끼 손가락 한 마디쯤으로 몸 끝에 달려 있다. 새벽 지평선 위에 로드킬 당한, 어둠의 애무에 가랑이를 벌린 순진무구한 사체가 간간이 눈에 띈다.
껍질 없는 영혼이 나신으로 뒹군다. 꿈틀대는 서로의 내장을 초음파 사진처럼 들여다 보아야 하는, 산다는 건 끔찍하다. 아직도 시퍼렇게 뛰고 있는 심장을 상설시장의 좌판 위에 내다 놓은 저 작부같은 세상은 이 아침에도 낯뜨겁게 격렬하다. 오늘도 육신을 광대 삼아 고통을 연출한다. 해가 지면 나를 팔아 너를 사고, 해가 뜨면 너를 팔아 나를 산다.
새 한 마리 화살처럼 날아온다. 심란하도록 작은 몸으로 나무의 심장을 향해 통통 걸어가더니 고요를 한 점 입에 물곤 왔던 길을 정확히 지우며 날아간다. 저 창 밖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사방이 투명한 영혼의 집, 창이 너무 넓다.
2008-05-21
이 월란
뒤뜰로 난 크낙한 창, 한 줌의 시간은 블라인드 사이로 겨울나무 가지마다 초록 발자국을 남기고 떠났다. 세월이 남기고 간 내 몸의 흔적도 저 블라인드 사이로 죄다 보일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진실의 깊이를 짚어내진 못한다. 대지는 메말라 쩍쩍 갈라지는데 상식은 늘 물 위에 떠 있다. 두 발 꼿꼿이 정박해 있는 섬이어야 했다. 수위에 따라 오르내리며 어지럽게 출렁이다 표류하는 난파선. 난 헤엄을 칠 줄 모른다. 바람은 미쳐가고 있다.
어제는 저 창 가득 회오리가 머리채를 흔들었고 오늘은 터질 듯 고요하다, 적막하다. 풍력 계급 0의 바람이 없는 상태. 10분간의 평균 풍속이 초속 0.0~0.2미터이며 육지에서는 연기가 똑바로 올라가고 바다에서는 수면이 잔잔하다는 그 고요. 들꽃의 정수리 위에 떨어뜨린 저 한 점의 고요로도 세상은 맑아지리라 꿈꾸던 내 어린 날은 새끼 손가락 한 마디쯤으로 몸 끝에 달려 있다. 새벽 지평선 위에 로드킬 당한, 어둠의 애무에 가랑이를 벌린 순진무구한 사체가 간간이 눈에 띈다.
껍질 없는 영혼이 나신으로 뒹군다. 꿈틀대는 서로의 내장을 초음파 사진처럼 들여다 보아야 하는, 산다는 건 끔찍하다. 아직도 시퍼렇게 뛰고 있는 심장을 상설시장의 좌판 위에 내다 놓은 저 작부같은 세상은 이 아침에도 낯뜨겁게 격렬하다. 오늘도 육신을 광대 삼아 고통을 연출한다. 해가 지면 나를 팔아 너를 사고, 해가 뜨면 너를 팔아 나를 산다.
새 한 마리 화살처럼 날아온다. 심란하도록 작은 몸으로 나무의 심장을 향해 통통 걸어가더니 고요를 한 점 입에 물곤 왔던 길을 정확히 지우며 날아간다. 저 창 밖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사방이 투명한 영혼의 집, 창이 너무 넓다.
2008-05-21
추천5
댓글목록
금동건님의 댓글
금동건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네...
고요를 몰고 날아간 새에 머물다갑니다
고맙습니다
엄윤성님의 댓글
엄윤성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시인 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동안 궁금했었는데,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리고 지독히도 고독하고, 쓸쓸한 글을 보는 듯 합니다.
새는 이미 날아갔는데, 적나라한 나의 모습은 세상에 이미 다 노출되었고
그러나 정작 나는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 채여서 허무해져버린 듯한 느낌의 글...
잘 뵈었습니다.
한미혜님의 댓글
한미혜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사방이 투명한 영혼의 집,
창이 너무 넓으면
어찌해야 하나요.
그 창은 숲과 통해 있지는 않을까요?
바다로 향해있겠네요.
항상 건강하시고,
항상 생각하게 하는 시귀에
더욱 보고픈 마음뿐입니다
최승연님의 댓글
최승연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오랫만입니다.
고요를 물고 날아간 새가 고독을 물고 왔군요^^
즐거운 하루 되세요 시인님!
허혜자님의 댓글
허혜자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좋운 시 잘 감상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