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오시는 방법(-클릭-) 회원가입은 이곳으로 클릭++^^ 시작페이지로 이름 제목 내용

환영 합니다.  회원가입 하시면 글쓰기 권한이 주어집니다.

회원 가입하시면 매번 로그인 할 필요 없습니다.

불교적 상상력과 문학/임헌영

페이지 정보

작성자 : 법문 박태원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 댓글 2건 조회 1,700회 작성일 2007-06-06 16:25

본문

불교적 상상력과 문학 
 
임헌영
<중앙대 국문과 겸임교수>
 
1. 종교와 문학의 접점으로서의 상상력

문학과 종교는 둘 다 인간 구원을 위한 인간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갖는다. 그러나 종교가 내세 지향성인데 비하여 문학은 현세 위주이며, 종교가 율법과 의식을 중요시하는 데 비하여 문학은 자유분방하며, 종교가 절대적인 존재를 숭상하는 데 비하여 문학은 평등 지향적이란 점에서는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상상력은 문학예술이 지닌 특성이고 종교는 오히려 상상력의 구속적 의미를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둘 다 상상력을 바탕 삼아 전개된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상상력은 마음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은 영상을 만들거나 경험을 초월한 세계를 만드는 정신적 능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P. 시드니는 신은 무의식 상태에서 세상을 창조했고 시인도 세상에 없는 형상들을 상상력을 통해 만들어낸다고 주장”했으며, “낭만주의 시대에 상상력은 천재 개념과 결합하여 신과 같은 창조력으로 숭상되었다”(한국문학평론가협회 편, 《문학비평용어사전》, 국학자료원, 하권 143쪽)는 풀이대로 종교와 문학은 상상력에서 결합한다.

헤겔은 《미학》에서 “예술미는 순수한 사유적인 기반 위에 세울 수 있는 논리적인 이념이나 절대적인 사상이 아니라, 정신의 영역에 속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정신의 유한한 인식이나 행위에만 머물지 않는 것”(두행숙 옮김, 《헤겔 미학》, 나남, 1권 제1부 〈예술미의 이념 또는 이상에 대하여〉 인용 및 참고)으로 이를 ‘절대정신’이라고 규정했다. 바로 이런 절대정신의 범주에다 예술적 상상력을 위치 지우면서 그는 여기에다 종교와 철학까지를 포함시키고 있다. 여기서 헤겔이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절대정신’을 가장 높은 단계의 이상으로 전제하고서의 판단이기에 “예술의 영역을 능가하는 것이 바로 종교”이며, 마지막 단계는 철학이라고 주장했다. ‘절대정신’을 바로 예술적 상상력과 결부시키는 건 그 개념이나 기능에서 문제가 있지만 앞뒤 문맥으로 볼 때 상상력과 같은 자유로운 의식 형태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편의상 인용해본 것이다.

그러니 헤겔식 절대정신의 차원에서 말한다면 상상력의 최고 단계를 철학-종교-예술로 보고 있는데, 여기서 철학이란 광의의 신학적 성격이기에 예술과 종교에서의 상상력은 흔히 착각하듯이 예술이 우위라고는 우길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이어 헤겔은 예술가의 상상력을 ‘창조적 상상력’이라 부르면서 “종교나 철학처럼 모든 사물의 진리성을 철학적으로 사유하고 이해해야 된다는 뜻은 아니다”(위의 책, 제3장 〈예술미 또는 이상에 대해서〉)고 구분 짓는다. 요컨대 예술적 상상력과 종교적 상상력의 우위 다툼이 아니라 서로 다른 형식의 상상력으로 절대정신을 공동으로 구축해 나간다는 점을 밝힌 셈이다. 헤겔은 이런 창조적인 상상의 능력을 발휘하는 정신행위를 ‘천재성’ 혹은 ‘재능’의 결실로 보았다.

세계종교사에 나타난 상상력과 세계문학사에 등장하는 상상력을 비교하는 작업은 엄청난 박학과 기발한 척도가 필요하겠지만 여기서 그런 묘기를 자랑할 필요는 없겠다. 깊지 않는 지식만으로도 상상력을 너무 신성시하면서 마치 문학예술만이 지닌 특권인 양 착각해온 상상력의 극한치들, 예컨대 우주 전쟁 따위의 공상과학 작품에 등장하는 공간개념부터 악마와 천사 같은 윤리의식에 따른 생명체 변이(變異)의 다양성, 시간의 길고 짧음에 대한 각종 기발한 표현들, 날아다니거나 구름을 타는 등의 인간 행위에 대한 무제한적인 기능 부여, 장생불멸에 대한 이상 추구 등등 모든 문학예술적 성과물들이 실은 따지고 보면 다 종교적 상상력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거꾸로 모든 종교 경전 그 자체가 기존의 문학적 상상을 혼성 모방한 것은 아닌지 자못 의아스럽기도 하다. 실제로 불교 경전 그 자체가 곧 문학 텍스트라고 주장하는 연구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도 이런 맥락과 통하며, 경전 그 자체를 문학 텍스트로 간주하노라면 종교적 상상력과 문학적 상상력은 일치한다고 해도 지나칠 게 없을 듯싶다.

세계문학사에 나타난 종교와 문학의 일반론적인 관계를 말한다면 초기에는 종교와 문학이 일치했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원시종교시대라고 일컬어졌던 고대 씨족과 부족국가로부터 절대왕권 체제의 성립까지의 사회체제는 예외 없이 권력과 종교를 일치시켰음을 볼 수 있다. 창조주와 종교의 창시자 혹은 이와 관련된 신을 찬양하는 형태의 문학은 세계문학사의 첫 장을 여는 주제와 소재로 등장하며, 이는 곧 신을 위한 문학으로부터 차츰 신을 믿도록 대중에게 설교하는 문학으로 변모해 왔음을 간파할 수 있다. 신화, 건국설화, 전설, 설화 등과 경전이 이 시기의 문학에 속한다. 바로 종교적 상상력이 가장 극대화되어 나타났던 시기이다. 인류의 문명이 발전함에도 불구하고 상상력에서는 이 시기의 상상력을 능가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시기는 ‘상상력 시대의 종교와 문학’이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불교에 국한해서 말한다면 이 시기에 각종 경전이 채록, 기술된 때에 해당한다. 불교에서는 일체의 경전이 여기에 속한다.

제2기의 종교문학은 문학이 종교에 예속되어 버린 시대라 할 수 있는데, 이 시기는 문학작품이 종교적 상상력의 계율에 묶여 있던 시기를 대상으로 한다. 불교문학적 관점에서 말하면 투철한 신앙심으로 찬불(讚佛)작품을 생산했던 시기에 해당된다. 불교사상을 전파할 목적으로 창조된 일체의 문학이 여기에 해당된다.

오승은(吳承恩, 1500∼1582)의 《서유기(西遊記)》(1570년경)는 삼장(三藏)의 일행인 손오공(孫悟空)·저팔계(猪八戒)·사오정(沙悟淨)의 모험기이다. 《서유기》의 대본으로 사용된 것이 《대당삼장 취경시화(大唐三藏取經詩話)》임은 상식인데, 불경을 구하는 과정을 손오공을 주인공 삼아 펼친 순례자 문학의 일종인 이 작품에서 인생무상을 절감토록 만드는 기본 요인은 방대한 우주를 무대로 펼치는 무한 자유 자재한 능력의 발휘 양상이다. 그런 웅휘한 시공간 속에서의 온갖 활약상으로도 인간 존재의 근본은 결국 ‘무상’이라는 점에서 상상력의 위력을 만나게 된다. 세계문학사적으로 보면 종교문학은 ‘순례자 소재’에서 걸작이 가장 많이 쏟아졌는데, 그 대부분이 인간의 상상력을 극대화한 작품이며, 이것은 종교적 상상력이 문학적 상상력을 확대시킨 원천이 된다.

제3기는 종교적인 예속으로부터 문학이 인간성 회복을 위하여 종교로부터의 해방을 구가했던 시대, 즉 르네상스의 문학을 지칭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성 회복 사상과 신앙관의 변모가 나타나지만 불교에서는 이에 해당될 만한 종교개혁이 없었다는 점에서 이 시기를 어떻게 적용할지 더 연구, 논의되어야 할 것 같다. 불교는 세계적 종교 중 가장 긴 역사를 지녔으면서도 종교개혁을 거치지 않는(혹은 거칠 필요가 없는) 신앙형태란 특이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원시불교 때부터 지니고 있는 다양한 인간적인 가치관이 온갖 상상력으로 두루 포용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불교는 다른 종교와는 달리 종파별 논쟁은 있어도 전쟁은 없으며, 심지어는 다른 종교와도 전쟁은 않는 세계적 신앙으로 볼 수 있다. 이런 특성 때문에 불교에서는 도리어 기독교 문학사에서 볼 수 있는 《데카메론》이나 《신곡》 같은 범휴머니즘적인 종교개혁적 창작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제4기는 근대 자본주의의 융성과 함께 대두한 신앙관으로 현대문학과 종교의 일반적인 관계인데, 문학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인간해방을 위하여 그 동안 전개해 왔던 각종 미학적인 모험이 여전히 실현되지 못한 상태에서 새로운 출구를 찾기 위하여 종교적인 방법론에 의지하거나 임차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여기에는 신앙인으로서의 문학과 비신앙인으로서의 문학이란 차이는 있으나 그 둘 사이의 변별성은 너무나 미세하여 일반 독자들의 시선에는 나타나지 않을 지경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신앙을 가진 작가 중에서도 마치 자신의 종교를 부정이라도 하듯이 극단적인 종교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비판하는 작품을 쓴 예가 있다는 뜻이다. 신앙을 가졌느냐 안 가졌느냐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적인 의미를 추구해 나가는 데 그 방법론으로서는 철학, 종교, 문학 등 그 무엇이나 좋으며, 어떤 방법론도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불교문학에서는 이 단계에 이르러 매우 성행하고 있을 정도가 아니라 비신자 문학인에 의해서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기독교를 비롯한 다른 신앙인에 의해서 불교적 제행무상과 윤회관, 자연관 등등은 널리 원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현대의 종교와 문학이란 지난 시기와는 달리 인간의 기복신앙 형태나 찬미의 문학만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론에 대한 궁극적인 천착을 다루는 방법론으로 연계되어 가고 있으며, 그것은 무한한 상상력에 기반하고 있다는 뜻이다. 종교와 문학적 상상력은 분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화학적으로 일체화되어 버린 응고체이며, 종교와 문학이 오랜 역사에 걸쳐 고도로 발전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현상은 변하지 않는다. 문학은 종교에서, 거꾸로 종교는 문학에서 부단히 그 상상력을 공급받는다는 점에서 상상력의 공급원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전히 종교와 문학의 상상력이 가장 극대화, 왕성했을 때는 오히려 제1기였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종교적 상상력은 무한한 것이다.

2. 불교적 상상력과 문학

많은 종교 중 불교는 우선 그 경전이 가장 복잡다기한 데다 엄청난 분량이란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주의 규모나 형태에 대한 상상부터 인간의 의식 형태에 대한 상상에 이르기까지 실로 너무나 다양하여 그 자체가 문학적 상상력의 근저를 이룬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기복(祈福)신앙 작품이 의외로 적은 대신 인생의 무상을 그린 예가 많은 게 불교문학의 특성인데, 그 무상의 개념을 가장 실감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가 무한한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 실로 불교적 상상력은 문학의 경계선을 훨씬 추월하고도 남는다. 현대물리학조차도 규정할 수 없는 무한대의 우주론적인 상상력부터 극락과 지옥, 전생과 후생, 윤회 등등이 실재적인 진리인지 어떤지는 차치하고라도 일단 그런 상태를 상상으로 인지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불교적 상상력은 문학적 상상력을 압도한다.

불교에서는 진리를 기록하는 언어조차 불신하는 사상이 있는데, 이는 진리의 오묘한 세계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함께 불교적 상상력이 극한치를 넘었기에 정착한 이론으로 볼 수 있다. 《유마경》에서 볼 수 있는 불이법문(不二法門)을 묻는 문수보살의 질문에 유마힐이 말없는 침묵으로 대응하자, “훌륭하도다. 참다운 불이법문에 언어와 문자가 어디 있으랴”고 찬탄한 문수보살의 응대는 불교적 상상력의 심원한 극한치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것뿐 아니라 “문자로 법문을 말하지 않고 다만 여러 가지 향내를 써서 모든 하늘사람들을 율행(律行)에 들게 하고 또 보살들은 이 미묘한 향내를 맡으면서 즉시 일체덕장삼매(一切德藏三昧)를 얻는다”는 《유마경》의 〈향적불품(香積佛品)〉에 등장하는 중향국(衆香國) 이야기도 이런 맥락으로 접근할 수 있다.

종교 경전 중 가장 문학적 상상력과 밀착해 있는 것이 불경으로 모든 불경을 문학작품으로 보는 견해(특히 일본학자들 중에 많다. 小野玄妙는 “일체 경전을 문학”으로, 泉芳璟은 “일체 경전을 중심으로” 삼은 불교문학을, 山邊習學은 “불교에 관한 일체 문헌을 불교문학”으로 본다. 이 항목은 박찬두, 〈경전문학의 가능성과 경전의 문학성〉 인용 및 참고)조차 있을 지경인데, 이런 주장 역시 그 상상력의 광대무변함에서 연유한다.

상상력의 극치를 보여 주는 실례로는 신화적 영역에 속하는 《기세경(起世經)》, 《화엄경》, 《법화경》 등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이 일련의 경전에 등장하는 상상력과 상징성은 어떤 문학적 천재의 상상력도 미치지 못했던 영역임을 입증한다.

불교에서 상상력의 발상은 ‘관법(觀法)’에서 유래한다고 보는데, 관법이란 “단순히 제법(諸法)의 실상만을 꿰뚫어 보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의 이미지를 통해 목적하는 세계를 상상함으로써 그 세계를 정신이나 현실 속에 구현시키고, 그것을 하나의 진리로 인식하는 《관무량수경》의 16관법에 이르면 이미지를 통한 불교적 상상의 방법을 알 수 있으며, 나아가 상상력으로 파악한 내용은 허구가 아니라 진리 그 자체라는 문학에서의 인식과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6관법은 상상력의 극치이며, 이러한 관법이 결국은 대승경전의 불가사의한 세계를 만들어 낸 요인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위와 같은 글, 이형기·이종찬·김태준·홍기삼 외, 《불교문학이란 무엇인가》, 동화출판공사, 인용 및 참고. 16관법에 관한 소개는 생략함).

불교적 상상력의 바탕에는 다음 몇 가지가 주요 요인으로 작용한다.

첫째는 힌두교를 비롯한 당시의 동양사상의 최고 단계에 속하는 인도 아리안들의 우주관과 가치관을 형성한 각종 상상력의 삼투작용을 들 수 있다. 세계 각 문화권의 여러 신화와 전설들은 저마다의 고유한 상상력과 그 방대한 공간개념이 특징적으로 나타나지만 힌두교적인 상상력의 무한함에 미치지는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각종 상상력이 불교에 이르러 보다 정교화되어 나타났기에 불교적 상상력은 세계 최고 수준의 상상력으로 정착했다.

둘째로 상상력은 언어와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그런데 불교에서의 언어는 바로 상상력의 무한성을 전제로 삼는다. 석가모니가 초기 설법 때 사용한 언어는 코살라국 말과 자신의 모국어였으나 이후 여러 나라에 걸쳐 설법을 했기에 마가다어도 추가되었던 데다 각 나라의 방언도 사용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당시 인도는 아리아계 일부가 원주민과의 혼혈로 아리아-드라비다계 족이 이뤄졌는데, 이들의 사용언어였던 프라크리트어가 널리 퍼졌으며, 석가는 이 언어로도 설법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지닌다.

이와 같은 다언어 사용을 유추할 수 있는 근거는 신분의 고하를 따지지 않았으며, 고상한 언어와 일상어를 구별하지 않았고, 신도들 누구나가 자신이 평소에 사용하던 모국어를 그대로 자유로이 쓰도록 했다는 석가모니의 설법의 철학에서 엿볼 수 있게 한다.

남방불교가 즐겨 썼던 팔리어는 프라크리트어보다 뒤의 것이자 산스크리트어(불경의 산스크리트는 고대 산스크리트어보다 후세의 것이다)보다 앞선 것으로 보노라면, 그리고 이런 언어들이 티베트나 한자문화권 등으로 진입하면서 새로운 ‘경전’을 형성시켰다고 볼 때 불경이 지닌 언어는 다의적(多義的)일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곧 불교적 상상력이 다른 어느 종교보다 복잡한 언어적 상상력을 지닌 한 이유가 된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이런 ‘경전’들조차도 구송(口誦)을 거쳐 후대에 이르러 언어로 정착했기에 그 미묘한 의미의 변모와 마모작용이 언어적 상상력을 배증시켰을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은 “중생은 여러 종류의 성(性)·욕(欲)·행(行)·상상 등의 분별로 살아가기 때문에 부처는 그들에게 선근(善根)을 만들어 주기 위하여 약간의 인연, 비유의 말과 글로 다양하게 법을 설”했다고 해명하는 데서 불교적 상상력의 문학적 대응을 엿볼 수 있다(이상 서영애, 《불교문학의 이해》, 불교시대사, 제3부 〈불교문학의 발달과 여러 장르〉 참고 및 인용).

불착문자(不着文字) 혹은 불립문자(不立文字)란 위에 든 상상력과 다언어(多言語)적인 사회구조가 낳은 결과일지 모른다.

3. 현대문학의 이정표로서의 불교적 상상력

위에서 본 것처럼 불교 경전 자체가 지닌 상상력이 바로 문학과 일치하는 관점은 현대문학에서도 그 주장 근거를 지닌다 하겠다. 그러나 한 발 물러서서 이런 관점에서 비켜나 불교적 상상력이 현대문학에 미친 영향력은 경전문학에 못지 않게 심대하다. 단재 신채호의 〈용과 용의 대격전〉과 〈꿈하늘〉과 같은 소설은 그 무대의 광대무변함과 사건의 우주적인 규모에서 가히 불경이 지닌 세계의 상상력의 현대적 재현이라 할 만하다.

단재의 작품에 대해서는 연구자의 관점에 따라 현격한 차이를 보여 일부에서는 예술작품으로서의 형상성이 떨어진다고도 보지만 냉철하게 따져보면 근대문학 전환기에 등장한 상상력과 역사를 결합시킨 가장 탁월한 걸작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무대는 현대한국소설사에서 가장 광대한 우주에 이르며 사건 또한 황당무계함에서 가히 포스트모더니즘적 상상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불교적 상상력에 기반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기껏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를 이상으로 삼았던 이광수의 상상력과는 비교도 안 되는 단재의 상상력은 불교적 상상력과 식민지 시기의 가혹한 탄압에 항거하려는 투지가 용해되어 분출된 상상력으로 높이 평가해야 될 것이다. 그 이후 어떤 작가도 단재와 같은 열정과 상상력을 문학작품에 전력투구한 예가 없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단재의 이와 같은 불교적 상상력과 문학적 상상력, 여기에다 역사적인 상상력까지 가미된 미학적 상상력의 극치는 리얼리즘의 오도 아래 잠시 쇠퇴의 길을 걸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참된 리얼리즘이란 상상력의 위축이 아니라 오히려 불교적 상상력까지도 앙양시키는 창조 작업이기 때문이다. 홍명희의 《임꺽정》은 그 수려한 문체와 어휘력과 역사인식에도 불구하고 기발한 상상력에서는 단재에 미치지 못한다. 이미 서구문학의 얌전한 상상력에 길들여진 독자들은 오히려 《임꺽정》을 훌륭한 문학작품이라 평하면서 단재의 광대무변한 불교적 상상력을 폄하하는 이론적 무장을 갖춰 버렸다. 물론 이 말은 《임꺽정》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아닐 뿐만 아니라 그 문학적 위대함과 기념비적인 업적을 전면 수긍하면서도 불교적 상상력이란 관점에서 볼 때 단재의 상상력과 비교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말일 뿐이다.

홍명희 이후 대하소설의 상상력은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여전히 단재의 상상력에는 못 미치거나 아예 그런 상상력을 절제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다.

대하소설로 불교문학에서 빼어 놓을 수 없는 박경리의 《토지》, 황석영의 《장길산》,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에 등장하는 승려들이 지닌 상상력은 그 좋은 예이다. 이들은 예외 없이 당대 민중의 삶의 현장에서 부당한 권력에 맞서는 역사의식의 터득자로 부상되는데, 이것은 한국문학사에서 소중한 성과들이다.

《토지》의 우관과 혜관, 《장길산》의 운부대사, 여환, 옥여 등, 그리고 《태백산맥》의 법일과 운정의 기행과 용기는 불교적 상상력으로 각박한 역사와 치열하게 대결하는 양상을 그린 걸작들이다.

그러나 불교적 상상력의 관점만으로 보면 많은 아쉬움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으며, 그것은 곧 홍명희가 섰던 좌표도와 같다고 하겠다. 단순히 불교적 입장에서 말한다면 고전문학에서의 불교적 기적, 기연(奇緣) 등 불교 교리에 충실했던 작품들, 예를 들면 김시습의 《금오신화》나 김만중의 《구운몽》 등에서 볼 수 있는 상상력에서 오히려 후퇴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세 봉건주의적 신앙의 굴레에 묶여 있던 종교적 상상력을 현대 산업사회가 어떻게 재생시킬지에 대한 문제는 또 하나의 과제로 등장하기에 여기서는 더 이상 논구를 피한다. 그리고 불교적 상상력이 곧 모든 문학의 절대적인 가치척도가 아님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근대문학 이후, 예컨대 이광수의 역사소설로서의 불교적 상상력을 그린 《이차돈의 사(死)》나 《원효대사》, 《꿈》 등은 순교와 신앙에의 귀의, 세속적 욕망과의 갈등을 극복하는 과정을 그리면서 모두 여인과 신앙의 갈등 극복을 기본 구조로 삼았다는 점에서 너무 통속적일 뿐만 아니라 지극히 결핍된 불교적 상상력을 엿볼 수 있다.

김정한의 《수라도(修羅道)》는 유교 숭앙 허씨 가문에 출가하여 반일 민족정신의 상징으로 불교 신앙을 구현하는 이야기로, 여기에 이르면 역사의식과 불교적 상상력이 혼연일체로 나타나지만 상상력은 그만큼 빈약해진다.
김성동의 《만다라》는 지산의 방황과 좌절을 통해 참된 신앙의 이상을 추구하는 형식인데 “내 눈깔에 점안은 누가 해주나!”는 지산의 독백이 우리 시대의 메마른 불교적 상상력을 애타게 갈구하는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이후의 불교소설, 예를 들면 한승원의 《아제아제바라아제》 역시 이와 비슷한 좌표도에 놓인다. 《반야바라밀다심경》의 끝 부분의 말로 ‘가자 가자 더 높이 가자’는 뜻인 이 제목이 암시하는 바는 불교적 상상력일 터이지만 신비와 이상을 추구하는 강수남(법명 진성)과, 파계와 방랑과 이타행으로 보살심을 실천하는 순녀(법명 청화)의 득도 과정을 통해 진정한 불교적 신앙의 상상력을 추구하는 이 소설 역시 상상력의 관점에서는 앞 세대의 수준을 능가하지 못했다.

이홍주의 《하산》은 1957년에 초판을 발행한 문제소설로, “성현으로서의 예수, 성현으로서의 석가는 위대할지 몰라도, 인간으로서의 예수, 인간으로서의 석가는 구제 받지 못했다”는 주인공 석파의 말에서 감지하듯 파격성을 지니지만 너무 답답한 상상력의 차단 안에서 축조되어 있다.

1990년대 이후의 불교소설은 윤대녕의 《신라의 푸른 길》처럼 자아탐구와 동양 전통사상과의 결합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약간의 상상력이 상승 기미를 타는가 싶지만 여전히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아마 이런 경향은 현대작가들이 고의로 불교적 상상력을 외면하면서 너무 현실적인 세속에 침잠하기 때문에 당연한 추세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세속적인 문학일수록 오히려 불교적 상상력을 포스트모더니즘적 기교로 충분히 원용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볼 때 현대 작가들에게 불경적 상상력은 오히려 훌륭한 이정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시에서 불교사상은 만해 한용운과 신석정의 역사의식으로부터 조지훈을 거쳐 서정주에 이르러 점점 현실과 괴리된 방향으로 치달아 왔다. 만해 한용운과 신석정은 불교적 상상력을 시 창작의 기본으로 삼아 대중성을 확보한 쌍벽을 이루는 시인이다. 이들은 그 수사법이나 상징적 기교, 자연에 대응하는 관조법 등에서 차이를 보이면서도 일제 식민지 시기의 갇혀진 상상력의 한계상황 아래서 최대치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당대의 아픔을 형상화한 시인이란 점에서는 일치한다. 이 두 시인이 이룩한 불교적 상상력은 그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한국 근대시의 상상력의 오차범위를 초월한 업적을 보여주었다. 이들에게 불교적 상상력은 곧 역사이자 민족이며 민중이었다는 점에서 대승적 상상력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조지훈에 이르면 불교적 상상력은 관조의 세계로 침잠해 버려, 그가 후기에 보여준 격렬한 역사현실비판 의식의 시는 불교적 상상력과 별개의 차원에서 이뤄진다. 즉 불교적 시는 관조의 세계에 초점이 놓여져 있었는데 현실비판 의식의 시는 불교적 상상력이 끝나는 지점에서 출발한다는 뜻이다.

서정주의 불교시는 인과응보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극히 원시적이다. 그에게는 불교적 상상력이 오로지 인과응보라는 계율에만 억매여 있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다. 연애시로서는 훌륭하나 불교적 상상력의 관점에서는 무척 답답한 상상력의 결핍을 느끼게 한다.

최근에는 황지우, 최승호 등에 의한 자아탐구와 노장(老莊)사상의 결합이 불교적 상상력으로 흥미를 끌지만 조지훈이나 서정주의 차원을 넘을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이런 현상은 1990년대 이후 시와 소설 전반에 걸쳐 동양사상과 혼류를 이뤄 선(禪)의 세계로 침잠해 들기 시작했는데, 이에 대한 평가는 아직 이를 것 같다. 서구 기독교 문학사는 곧 근대 세계문학사의 별칭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풍성하다. 초기의 편협한 신앙 간증적 문학에서 인간성 해방의 단계로 접어든 이후 현대에 이르러서는 카잔차키스의 여러 소설에서 보듯이 그 상상력이 역사와 밀착하면서 많은 업적을 쌓고 있다.

불교적 상상력은 이제 진정 21세기적인 포스트모더니즘과 역사인식의 결합으로 새로운 르네상스를 창출할 수 있는 원천이란 점에서 여전히 인류문학의 보고로 남아 있다.

바로 이런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불교적 상상력을 발상법으로 삼은 현대 문인으로 고은이 위치한다. 고은에 이르러 우리의 불교적 상상력은 신채호와 직결되어 만나게 된다. “여기가 로고스다. 여기서 뛰어라”는 헤겔의 말처럼 오늘의 우리 불교적 상상의 문학은 여기서 재출발선을 찾을 수 있다. ■
 
임헌영
중앙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6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현재 중앙대 국문과 겸임교수,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회장, 《에세이 플러스》 주간. 《한국현대문학사상사》를 비롯해 20여 권의 저서가 있다..
추천0
  • 트위터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댓글목록

법문 박태원님의 댓글

법문 박태원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포스트 모던니즘이란 이성으로 사물의 실체를 파악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해체한다 곧 거시기를 체득해야 한다. 요즘은 몸소 증득한 것을 말하고 써야 인정받는 때가 되었습니다. 상상력도 의식을 초월할 때 광대무변해 지니까요.

朴明春님의 댓글

朴明春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해학과 기지가 돋보이는 평론~ 좋습니다
서울대 교수로 계시다가 퇴임한 김윤식 교수님이 떠오릅니다
소곤소곤 나긋나긋 그러면서도 예리한 칼로 베어나가는 평 평~
읽고 느끼고 맞춰 풀어나가는 평 평 평 끝이 없지요
어디에다 맞춰 평을 해 드리면 독자가 만족을 할까?
긴 글 쓰시느라 수고하시고 열정 대단하십니다
평론으로 무궁한 발전을 기대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빈여백동인 목록

Total 21,451건 420 페이지
빈여백동인 목록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추천
4691
소금인형 댓글+ 5
no_profile 손근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760 2007-06-03 0
4690
동문서답 댓글+ 9
한미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694 2007-06-03 0
4689 법문 박태원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2041 2007-06-03 0
4688
내 당신 댓글+ 5
임춘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69 2007-06-04 0
4687
막일 댓글+ 4
홍갑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754 2007-06-04 0
4686
상상임신 댓글+ 6
이월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858 2007-06-04 0
4685 no_profile 낭송동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487 2007-06-04 0
4684 현항석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452 2007-06-04 0
4683 현항석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404 2007-06-04 0
4682 현항석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404 2007-06-04 0
4681
산 행 댓글+ 3
황 숙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43 2007-06-04 0
4680 신의식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652 2007-06-04 0
4679 no_profile 시사문단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587 2007-06-04 0
4678 no_profile 이필영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84 2007-06-05 0
4677
종이인형 댓글+ 6
이순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428 2007-06-05 0
4676 이월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21 2007-06-05 0
4675 금동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844 2007-06-05 0
4674 정유성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46 2007-06-05 0
4673
밥 퍼주는 당신 댓글+ 6
한미혜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689 2007-06-05 0
4672
밤의 외출 댓글+ 1
임우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87 2007-06-06 0
4671
허수아비의 꿈 댓글+ 1
임우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79 2007-06-06 0
4670
막일2 댓글+ 4
홍갑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49 2007-06-06 0
4669
뒷뜰의 장미 댓글+ 5
이월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91 2007-06-06 0
열람중 법문 박태원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1701 2007-06-06 0
4667 현항석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89 2007-06-07 0
4666
막일 3 댓글+ 4
홍갑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56 2007-06-07 0
4665 박종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91 2007-06-07 0
4664 박종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45 2007-06-07 0
4663
심발지진 댓글+ 4
이월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647 2007-06-07 0
4662
그대는 찔레꽃 댓글+ 7
금동건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99 2007-06-07 0
4661 백원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73 2007-06-07 0
4660 박효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655 2007-06-07 0
4659 이순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99 2007-06-07 0
4658
시인의 아침 댓글+ 7
정유성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442 2007-06-07 0
4657
팔봉산 가는 길 댓글+ 2
유철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813 2007-06-07 0
4656
십오척 담장 댓글+ 1
유철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300 2007-06-07 0
4655 박명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1 2007-06-08 0
4654
막일 4 댓글+ 3
홍갑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65 2007-06-08 0
4653
느낌표 하나 댓글+ 3
박치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256 2007-06-08 0
4652
수화 (手話) 댓글+ 8
이월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536 2007-06-08 0
게시물 검색
 
[02/26] 월간 시사문단…
[08/28] 토요일 베스트…
[07/03] 7월 1일 토…
[04/28] 5윌 신작시 …
[11/09] 2022년 1…
[08/08] 9월 신작 신…
[08/08] 9월 신작 신…
[06/29] -공개- 한국…
[06/10] 2022년 ◇…
[06/10] 2022년 ◇…
 
[12/28] 김영우 시인님…
[12/25] 시사문단 20…
[09/06] 이재록 시인 …
[08/08] 이번 생은 망…
[07/21] -이번 생은 …
 
월간 시사문단   정기간행물등록번호 마포,라00597   (03924)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북로54길 17 사보이시티디엠씨 821호   전화 02-720-9875/2987   오시는 방법(-클릭-)
도서출판 그림과책 / 책공장 / 고양시녹음스튜디오   (10500) 고양시 덕양구 백양로 65 동도센트리움 1105호   오시는 방법(-클릭-)   munhak@sisamundan.co.kr
계좌번호 087-034702-02-012  기업은행(손호/작가명 손근호) 정기구독안내(클릭) Copyright(c) 2000~2024 시사문단(그림과책).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