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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온밭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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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권영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1건 조회 978회 작성일 2006-10-12 12:40

본문

보온밥솥


하루해가 서쪽으로 고단한 등 돌릴 때
오늘도 어김없이 삐걱거리는 나사 빠진
뼈마디를 추스르며 옷깃을 세운다
어금니 지그시 깨문 대문은
입술을 열지 않았고 아내는 오늘도
손끝 차가운 공장에서 오도도 떨며
불빛을 부둥켜안고 있는 모양이다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한숨은
퀭한 눈으로 낯설지 않은 비밀번호를 퉁긴다
어둠을 삼키던 늙은 불빛이 힘없이 끔벅인다

아내가 곱게 단장한 밥상이
수줍은 면사포를 던지며
허둥지둥 허기진 배로 달려온다
이 빠진 밥그릇은 물오른 시장기를 참지 못하고
낡은 보온밥솥으로 향한다
지독한 관절염에 걸린 뚜껑은
심한 통증을 느끼며
속내를 허옇게 드러내 놓는다
메밀꽃 같은 엷은 수증기를 토하던 보온밥솥으로
토실토실한 당신의 세월이 모여 있었다

순간 올라오는 울컥 임

그을린 살 속으로 해거름 들어서도
숨 돌릴 틈조차 없던 당신 모습이
노을에 주름깊이 새겨진 세월로
수척한 등살 넘어 붉은 눈물 한 줌으로 스친다

지난밤 두런대는 빗소리에,
서슬 퍼런 바람소리에,
굼틀대는 씨앗들의 아우성에,
당신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당신보다, 나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던 씨앗들의 삶
그런 당신에 뒷모습을 야속하리만큼 싫어했다

나는 보았다
빗줄기가 톱날처럼
당신에 어깨 죽지에 박히는 것을
항상 지친 살갗을 긴장감으로 세워놓고 사셨던 生

웅크린 고통의 무게가
홀 이불 타듯 불티처럼 날아간 횅한 들판
인생 끝자락에 매달린 앙칼진 붉은 씨앗이 밥솥에서 흔들린다
한 움 큼 쥐어 든 애절한 삶이 하얗게 부서진다.
토실토실한 밥풀 속으로 풀어놓으신 생을 씹는다
소슬 거리던 날숨은 터지고
눈물 한점 빈 그릇 위로 내려앉는다

당신은 저만큼 물러앉아 언제나 나를 보고 있다.


추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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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손근호님의 댓글

no_profile 손근호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권영국 시인님 오랜만입니다. 바쁘신 일에 업무도 겹치신다는 말에..언제고 한가하시면 모지 빈여백 오시라 했는데. 이제 오셨군요. 도장 꼭 찍었으니. 오시는대 게을리 하지 마시고 자주자주 뵙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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