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태어나서 일생동안 자신만을 알고 가려해도 결국 인간은 아무것도 알 지 못합니다. 노력하면 어느 정도는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 말 속에서는 결론을 이미 알고 있다라는 뜻이 내포되기 때문입니다.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윤리의 문제가 우리에게는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넓게는 인간의 삶이 죽음으로 마감하는 운명적인 한계에서부터 좁게는 인간이 인간을 왜곡하게 만드는 불합리한 사회구조 속에서 그리고 스스로 구속되어진 인간의 무의식 속에서 인간의 욕구가 여러 가지 현상과 부딪히면서 삶에 회의를 갖게 됩니다.
뭐 어때 어차피 허무한 세상, 괜찮다고 긍정을 하며 살아도 조금만 생각을 늦추면 안개에 쌓여있는 듯 삶은 불안하고 허무하고 위태로움마저 느껴 또 다시 무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역사적으로 발전해온 자본주의는 인간을 풍요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병든 인간을 만들었고 종교는 삶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며 현세의 삶을 긍정적으로 이끌기 보다는 빨리 죽는 것이 지혜인 냥 내게는 그렇게 느껴집니다. 황금의 손 마이더스, 미다스왕도 권력을 쥐고 모든 것을 성취했어도 삶이 허함을 느끼고 지혜의 신에게 최고의 삶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대답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 대답에 꼭 수긍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림의 밑바탕의 빈여백 처럼 아무리 그림이 화려하게 공간을 채운다 하더라도 어딘가 모르게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그 무엇이 우리를 사로잡는가봅니다. 그래서 니체도 병들어 있는 몸을 만물과 공명하면서 털어냄으로써, 어차피 주어진 삶에 적극적으로 긍정하며 앎을 통해 스스로를 정화하기를 바랐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화가는 그림을 통해서 연주자는 연주를 통해서 시인은 시를 쓰는 과정에서 내재적인 가치를 긍정하며 자신의 참다운 존재를 깨닫듯이......
시인은 시적 자아. 주체를 둘러싼 생활환경, 꿈 ,사랑, 심지어 증오 같은 감정들을 표현함으로써 불안한 삶의 발란스를 유지합니다. 증오는 증오 자체가 목적이 아닌 감정입니다. 시인에게서 있어서 시를 쓴다는 의미는 시적인 생활을 하기 위한 훈련인지도 모릅니다. 여러 번 자신의 시를 고치고 또 고치고 하는 가운데 생활의 반성의 생기고 그 반성으로 인해 우리는 자신의 정화작용이 가능해집니다. 도종환 시인은 습작시를 태우는데 밥 한 솥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듭하다보면 어느 날 진정한 시인의 삶을 영위하게 될 때 그 때 삶의 본질에도 한층 다가설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자연스럽게.
그래서 오늘도 ‘시란 무엇일까’ 보다도 ‘시인의 삶이 무엇일까’하는 질문을 제 자신에게 던져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