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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답꾸미의 사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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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김현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7건 조회 3,382회 작성일 2008-07-23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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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답꾸미의 사계

 

                                                                      김현길

 

1
초봄, 마을 앞 간척지 저수지에는 붉은 벼슬을 주억거리며 물기새들이 분주히 헤엄을 치고 다녔다.
갈대와 수초가 어우러진 곳에서는 산란기를 맞은 잉어들이 불쑥불쑥 꼬리를 물 위로 솟구치며 짝짓기에 여념이 없었고,
하굣길 책보따리 어깨에 대각선으로 맨 개구쟁이들이 둔덕천 징검다리를 어미 따르는 새끼염소들처럼 건너 와서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저수지 둑에서 피비를 뽑아 먹고 놀았다.
방천밑에 엎드려 집게다리가 빨간 농게를 돼지풀로 귀똥차게 꼬셔내고 있을때, 느닷없이 형님들이 나타나서 우리들을 싸움 붙이던 곳도 저수지 둑이었다.

그때 벌써 k-1 유명 프로모터들인 영주, 덕기, 외도 형들은
헬리콥터 푸로펠러 모양 휘둘러대는 영철이 손을 치켜들어 승리를 선언했고, 머리에 굴쩍시기가 많은 아이는 그것 때문에 늘 불리했다.
싸움에 지고 프로머니는 커녕 진물 흐르는 머리를 감싸고 울면서 집으로 가야만 했다.

겨울이 되면서 얼어붙은 저수지는 신나는 우리들의 썰매장이 되어 주었다.
길용이 형의 창문틀 레루철까치로 만든 썰매가 그중 소문나게 빨랐다.
종구, 용기, 동기, 석범이 형들은 어디선가 꼬불쳐두었던 철근 동가리로 창을 만들어 이따만한 잉어들을 왠간히도 잡아올렸고, 
그렇게 겨울은 가고 또다시 저수지에는 어김없이 봄이 찾아 왔다.

갯논에서 모내기 하던 동네 아주머니들이 우리들을 불러 '어구' 안윤이가 지고온 바가지에다 못밥 얻어 주던 곳 또 한 저수지 둑이었다.
자릿모내기가 끝나 갈 무렵이면 동네 처녀들은 거진 녹초가 되었고, 누군가 줄지은 궁둥이 향해 일부러 물 튀겨 모 한 춤을 던졌다. 병균형은 못줄넘기는 척, 얼굴에 뻘물 튀기며 장난을 곧 잘 쳤다. 그러면서도 다들 즐거워했다.
우리는 모수발 잘하면 사위 삼을꺼란 말에 열심히 모수발 했건마는 그 후 누구도 모수발 잘해서 사위됐다는 말은 끝내 들어 보지를 못했다.

2
엿장수를 그만둔 후 시작한 상복이 아버지의 뻥튀기 온도계가 삼백도에 이르러면, 쪼그리고 앉아 지켜보고 있던 상복이는 아버지에게 도수를 제빨리 알려주었다.(아버지! 삼백도가 다되가요. 오! 그랑깨 꼬신내가 나더라.)
그때 코를 훌쩍이며 서있던 우리들은 일제히 손으로 귀를 막았고 될 수 있으면 망테기 가까이에 섰다가, 뻥! 소리와 동시에 하얀 연기 속으로 돌진하여야만 겨우 몇 톨의 강냉이볶음을 주워 먹을 수 있었다.
또 상복이 아버지는 별스럽게도 백고 칼로 자식들 머리를 깍았는데, 시퍼런 백고 칼이 사정없이 밀고 지나갈 때 마다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새끼중으로 변한 상복, 상술, 상샘 세형제를 본 뒤로는 나는 아버지에게  하지카리 이발 해주란 말을 절대 하지 못했다.

멀리서 확성기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가설극장 차가 막 맞바꾸미를 돌아오면서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둔덕면민 어쩌고 저쩌고" 하면은 벌써 마음은 농막 다리거리로 가 있었다.
돈 없어 개구멍으로 막 치기하다 빌어먹을 상복이 천식 기침 때문에 기도한테 걸려 천막 걷을 때 까지 꿇어 앉아 있어야만 했다.
"수양대군과 백두건" 이라는 영화였는데 천막을 걷고 난 후 뒷부분 조금 본 것으로 그 영화를 다 본 것처럼 다른 아이들한테 자랑을 쳤다.

겨울밤이면 태종이와 나는 목 쉰 할바씨 방에서 등잔불 심지 돋우워가며 사이좋게 이를 잡았고, 할바씨가 몽침을 베고 잠든 사이 패 떠다 둔 화툿장 꽃을 맞추고 놀았다. 한적한 골목길에서 계집아이들과 사겸지기를 살았고, '텡방구쟁이'노래를 부르며 태정마당에서 걱정없이 고무줄 뛰던 그 계집아이들은 지금쯤은 어떻게들 변해 있을까? 또 염전에 살면서 둑길 오가며 메뚜기 잡아 강아지풀로 낌지 끼던 현만이는 그때 과연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 당시 동네 큰 형들은 불법 화약총을 만들어서 놀았는데, 옆구리쪽 중우마리에 총을 꼽고는 저그들이 무슨 독립군이라도 되는 양 성냥개비화약을 있는 데로 까 넣고 다안등으로 덜그랑으로 떼거리로 몰려 다니며 주제소 습격하듯 빵! 빵! 총질을 해댔다.
달명이 형은 어쩌다 소 뒷발에 쥐잡기로 까마귀를 쏘아 맞혔는데. 자기가 백 년에 한 명 날까말까한 명사수 라고 큰소리치고 다녔다. 그런 모든 것들이 어린 우리에게는 너무 멋져 보였다.

3
떡갈나무에 연초록 새순이 필 때면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아침마다 소 바탕인 손골산으로 소 먹이로 갔다.
소들을 대충 잔솔 나무에 매어두고 이슬에 젖은 바짓가랑이를 말릴 사이도 없이 잽싸게 밥 먹고는 학교로 뛰었다.
학교를 마치고는 태정마당에 모여서 구슬치기, 딱지치기, 표때기를 하고 놀았는데,
남 먼저 "범 시험 구멍" 까지 마스터한 복조형의 구슬은, 우리가 제아무리 돌팎뒤에 구슬을 숨겨도 곡사포로 기막히게 쏘아 맞혔다.
또 두균이의 때기치는 솜씨는 그 누구도 당할 재간이 없었다. 형 뻘인 우리가 쫄쫄 다 꼴았다.
표때기는 양손에 엉성하게 갈라 지고 찍어 먹기를 영균이와 봉수가 잘했고, 너도나도 그들과 `동아 걸기'를 원했다.
신나게 놀다가 목이 마르면 찬 물에 사카리 타서 둘러 마시고 다시 손골산으로 소먹이로 갔다.

소나무에 뱅뱅 감겨져서 어린 주인 오기만을 눈 빠지도록 기다리던 소들을 끌러서 어구 뒷산으로 쫓아 올려놓고는,
주로 여시바우에 모여 새끼 여시들 모양 못된짓은 다하며 놀았다. 남의 밭 고구마 서리해다 구워먹고 보리 꺼슬러 먹는것은 기본이고, 담배 피우고 하늘 뱅뱅 도나 보기, 개구리 뒷다리만 잘라 구워먹기, 두 장 쪼이기인 섯다 화투놀이 등등...
한동안은 손골 재목아지에서 공 차고 노는데 정신을 뺏겼다.
운동장 넓힌다고 괭이, 소쿠리, 바지게, 리어카 를 강제동원 시켰다.

초대 손골대장은 병일이 삼촌이 분명하고 마지막 손골대장은 내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부분은 순전히 광수 생각)
히야 하야 놀다가 어느새 해가 유안산으로 꼴깍 넘어갔고 배가 들 찬 소들을 억지로 물을 먹여 채웠다.
미길소인 우리 집 소는 까분디기도 다른 집 소보다 많았지만,
우째 그렇게도 허덕구던지 잠시 한 눈 깜짝할 새 돌담부랑 넘어 씨절이, 현주 영감 나락논을 조졌다.

그러고 손골산은 소바탕이기도 하지만 동네 사람들이 죽어 묻히는 공동묘지 이기도 했다.
꽃상여에 열두 상두꾼들은 만장을 앞세우고 어허럼차를 합창하며 송골산으로 곧장 향했었다.
상여 맨 앞줄에는 주로 좌청룡은 종구형이요, 우백호는 중기형이었다.(키가 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음)

4
동네에서 제일 큰 밭인 석권 집 밭에 똥장군이 도착하고, 6.25 동란의 흔적인 pw 영문이 새겨진 옷을 입은 아버지가 구강 밭에 똥오줌을 찍드릴 때면, 그것을 보면서 벌써 부터 보리타작 할 걱정들을 했다.
누렇게 익은 저 보리들을 다 어찌할꼬 할 때쯤이면, 태수영감 댕기자끼 방아 기계는 어느새 신작로 공터로 옮겨져 있었고, 타작 시 그 개끼의 끄꺼러운 맛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과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팔월 염천, 태종이 집 덜겅밭 옆 포구나무에 왕매미와 소매미 울음소리가 절묘한 화음을 이룰 때면
우리는 냇가에 멱을 감으로 갔다.
비렁덤벙 십여 몇타 높이의 복바우 위에서 코 잡고 뛰어내린 몇 안 되는 아이들의 간 큰 배치기 다이빙은 요즘에도 간혹 술자리 안주로 회자 되곤 한다.(이판사판 뛰어 내린 아이는 영철이, 이신, 용언형 정도로 기억함.)
입술이 파래지도록 물속에서 놀다가 해가 김치국에 밥 말아 먹고 장구치고 나올 때 까지 기다렸다.
달빛이 어스름한 밤 냇고랑에서는 동네 처녀들이 멱을 감았고, 몇몇 차리밧은 아이들은 숨어서 지켜보았다.
비로소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곳도 알고 보면 둔덕천이다.
여름 밤 태정마당에는 별들의 향연이 계속되었고 포구나무밑에서 임이 엄마의 옛날이야기 (주로 귀신, 도깨비) 까지 듣고서야 집으로 오다가 괜히 반딧불 보고 놀라기도 했다.

5
소득사업의 일한으로 집집마다 니비를 쳤는데, 잠자는 방에다 시렁을 만들고 우리는 그 밑에서 잠을 잦다.
뽕잎을 따서 처음에는 잘게 썰어주다가 니비가 석 잠 정도 자고나면 그때부터 뽕잎을 통째로 그냥 주었다.
친구들과 놀면서 주둥이 시커멓게 오돌개를 따먹었고, 그래도 입이 꿀짐하면 강냉이대를 꺽어 원없이 씹어 돌렸다. 밤에 입 벌리고 자면 니비똥이 입으로 막 들어올 정도였다. 드디어 니비들이 넉 잠을 마저 자고 색깔이 노랗게 변하면 섶을 만들어 올렸는데, 적당한 시일이 지나자 비로소 어머니들은 섶에 촘촘히 박힌 하얀 누에고치를 정성스레 따서는 면사무소가 있는 하둔에가서 공매를 시켰다. 일부를 남겨 명주실을 뽑았는데,
우리는 `부우룽 부우룽' 물레잣는 할머니 옆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번데기를 주워 먹고 놀았다.

추석 날이면 다안등에는 수령을 알 수 없는 돌배나무가지에 누군가 그네를 매었고,
때때옷에 꽃신을 신은 계집아이들은 쇠널 쪽 하늘을 마음껏 발로 찿다.
남자아이들은 노란 단추 달린 인민복같은 학생복에 까만 운동화 한 켤례 얻어 신으면 그저 그만이었다.
또 그곳에서의 "진똘이"는 어찌 그렇게도 재미있던지, 유안산에 노을이 붉게 지고 집집 마다 저녁 밥 짓는 연기가 오를 때 까지도 놀이는 계속 되었다.

어둑어둑해지자 엠프 소리보다 더 큰 엄마들의 밥 먹으러 오라고 부르는 소리 (대표적으로 동~윤아!~ 용~권아!~) 를 듣고서야 아이들은 하나둘씩 집으로 불려갔다.
저녁을 먹고는 달이 훤한 중담 골목길에서 편 갈라 미국, 소련 스파이 놀이인 "쿵끼'를 했고, "자세자세" 하면서 상대편을 검문하였다.
남바 3번이 보통 스파이들이었고 주로 숨는 곳이 수남이형 소마굿간 더금위였는데, 그 어문이가 우리들을 쫓아내면서 `밑 빠진 소쿠리 한 거석 나간다.'고 하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6
가을이 되면 동네 단감나무 있는 집은 언제나 우리들의 공격목표 1호였다. 그래서  왕구태집과 구진이 집 단감나무는 수난의 연속이었다. 감을 따다 들켜 둑으로 많이도 톳겼다.
벼가 누렇게 익을 때 면 집집마다 수틀에다 쓱쓱 낫을 갈았고, 시퍼렇게 날 선 낫으로 파드득파드득 나락 밑둥를 열심히 잡아 당겼다.
여자들은 마른 나락을 깻단으로 묶었고, 남자들은 지게로 나락짐을 져 날랐다.
태정마당에 볏가리를 몽고텐트 처럼 쌓아 놓고 추워질때까지 수시로 탈곡을 하였는데,
발굴리기 탈곡기의 앵냥 거리는 소리가 암담, 중담 두 태정마당에 끊이 질 않았다.
친구들과 볏가리에 올라가 뭉개고 놀다가 주인에게 욕 바가지로 얻어 먹기도 하였고,
무삼이 형집 볏가리에다 누군가가 불을 내기도 하였다.

7
겨울 밤이면 봉선이 작은 방에서는 편짜서 묵내기 민화투를 쳤었다. 씨아기로는 구수형한테 당할 사람이 없었다.
몰랑몰랑한 살짝 언 고구마를 먹으면서 콩에다 구녕뚤어 꿩 약 만들고, 오리고 만들고, 연 살 깎고. 해미당, 법동개를 오가며 닭서리, 강냉이서리 등등. 지금 같으면 전부 경찰서 유치장 깜의 일들이었다.

내 군대 첫휴가 나왔을 때 동생들이(두종, 장호, 석용, 덕구 또 누구더라...) 형 욕보고 온 기념으로 쇠널 끄트머리 왕구태집 닭 서리해다가 봉호집에서 삶아 먹는 것 까지는 좋았는데.
할매, 영감이 플래시 켜들고 씩씩거리며 설마 쫓아 올라 올 줄이야... 밤늦게 불켜저 있는 집만 골라 착착 뒤져 드디어 `현물 잡았다.'고 하면서 경찰서 운운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돈 얼마씩 모아 물어주고는
다음 날 셕권이가 윷을 놀아 그 돈 도로 따 먹은 사건하며...

지금에사 한 가지 더 실토하지만 염전 상식이 형 집에서 닭서리 해다가 덕조 고모집 석유곤로 훔쳐 태종이 아랫방에서 삶아 먹었고는 곤로만은 원위치 시킨 사건도 벌써 형사 시효가 몇 번은 지나갔을 거야.

한 번은 태종이와 장호동생을 겁주어서는 정지 옆 더금위에 영균이가 몰래 감추어둔 밀수보따리를 세관원처럼 적발 해서는 그것을 또바우 집에 가지고 가서 라면 바꾸어 삶아 먹은 곳도 태종이 아랫방이었고.
되지도 않는 연극 보여준다며 친구들에게 관람료쪼로 고구마 한 개씩 줄줄이 가져오게 한 곳도 태종이 아랫방이었다.

또 동네에서 유일한 라디오 있는 집 이었던 덕조 작은 방에 시루 속 콩나물 처럼 빽빽히 모여앉아,
큰방에서 들려오는 라디오 연속극 "님 따라 구름 따라"를 숨죽여 가며 재미있게 들었다.(호로곡에서 주인공이 애절하게 부르던 민 소저,그리고 말 울음소리, 말 밟굽소리 등등) 
지금 같으면 큰방의 어먼, 아버지보고 `볼륨 좀 더 크게 올려주이소 할 껄' 차마 그러지를 못했다.
 
배고픈 시절 너도나도 밀수를 했는데, 간 작은 동현이 밀수 보따리는 적었지만 자주 했고,
간덩이 큰 영철이의 밀수보따리는 한 방에 아예 쌀자루째 매고 또바우 집으로 향했었다.
군것질은 하고 싶고 돈은 없고, 부모님 몰래 하둔 점방(주로 또바우영감, 중진영감집)에 쌀을 퍼다주고 라면이나 과자부스러기를 바꿔 먹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행위를 우리는 밀수한다고 했다.

8
어느 날 형들은 동네에서 마당이 제일 넓은 동관 형 집에서 연극무대를 꾸몄고,
드디어 "동랑 유치진 선생"의 후학들은 "가시리"라는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주연배우로는 외도 형, 동기 형, 이선 이야가 아니었나 생각 되어지고,
극본과 감독은 현식이 형님이 맡아 했었는데 "가시리"라는 만화를 각색한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어떻게 그 당시 연극 할 생각들을 했을까?
형들이 한없이 존경스럽다는 생각 밖에 안 든다.

무종이 형집에서는 콩쿨대회가 열렸었는데 항시 일이 등은 정해져 있었다.
주최 측 농간이 있을 줄 뻔히 알면서도 인근각지 (멀리는 한산도)에서 노래깨나 하는 처녀 총각들이 그래도 많이 모여들었다.
점용이 형은 덕석 깔아 놓고 우리에게 유도를 가르쳤고, 선수촌의 선수들처럼 우리들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구보를 했다.
생엿 오환어치는 죽어도 안 판 다던 엿쟁이 영감, 그 아들 '앵이'는 아모실 태정마당에서 웃통 벗고 대면(구렁이)를 구워 먹었는데, 불빛에 비친 그의 벗은 등짝이 대면 껍질 보다 더 번질그렸다.
새마을 운동이 한 창이던 때 3반 반장이던 병현 형님은 마을 안길을 넓히면서 완강하게 버티는 중부님의 허리를 급기야 뒤에서 껴안았고, 그 사이 마을 청년들은 탱자나무가 비스듬히 서있는 장독대 담장을 허물어 버렸다.

9
추수가 끝나고 나면 햇볕 바른 곳에 모여서 이엉을 역었고, 밤새워 새끼를 꼬았다.
빈 들녁에는 하늘 가득 청둥오리떼와 기러기가 편대를 지어 날아왔는데,
`기러가 기러가 줄져라,' 하면 신기하게도 기러기들은 브이자형 줄을 지었다.
그럴때면 물 고인 논에다가 너도나도 오리고를 놓았다. 동지 아래 두 마리만 먹어면 겨우내 내복없이도 지낸다고, 태정마당 짚볏가리위에 엎드려서 동현이는 '심통'이던 '쫌뱅'이던 한마리만 걸려라 하고 끈질기게 지켜보고 있었다.
정길이가 자기 아버지 오징어배에서 말려온 잇가 한 마리 몰래 가지고 나오기만을 담벼락에 가슴 대이고 감도록 기다렸던 사립팎 돌담은 블록 담으로 바뀐 지 오래되었고, 상복이 밭 원두막에서는 참외 하나 얻어먹은 죄로 그의 장황한 `수박, 참외 제배법'을 듣기 싫어도 들어주어야만 했다.
면민 축구대회 때 동네 생기고 처음으로 결승에 올라 옥동과 맞붙었을 때 이마가 찢어져 붕대를 감고도 헤딩골을 멋지게 성공시킨 윤희 친구... 
그러나 이들은 뭐가 그리도 급했던지 일찍이도 저세상으로 떠나가고 없다.

동네 앞 호리가다에는 물 반 고기 반 이었고, 붕어와 뱀장어가 고랑 따라 굼실 댔다.
염판에 들어온 숭어떼를 자망을 얻어다 이중으로 둘러치고서 팬티만 입고 잡힐 때까지 쫓았다.
얼마나 신이 났던지 영권이는 북극곰이 연어를 물듯 숭어를 입에 물고서 다음 놈 잡으러 뛰었다.
수문구녕 방맹이만한 문조리 낚아서 무채 썰어 넣고 막걸리 삭혀 만든 식초에다 버무려서 동네 회치하며 댓병을 상자로 비우던...
아! 그 시절로 정말 다시 한 번 돌아가고 싶다.

10
설날 어른들은 `가시 편히 쉬었습니까?' 하고 인사 한 다음 서로 덕담을 주고 받았고,
우리는 친척집을 돌며 세배돈을 징수했다. 그 돈 모아 연종이 사서 연 만들어 띄우기는 또 얼마나 신이 났던지.
사금파리 곱게 빻아서 연시올에다 사를 먹여 연싸움을 했는데, 산밑으로 낮게 싹싹 고리다가 탱금을 주어 방향을 바꾸어서는
장반짜리와 한장짜리 방패연은 드디어 뒷산 공제선 위에서 크로스가 되었고, 얼레에 감긴 실을 있는 데로 풀어 먹였다. 우리는 옆에서 '조야'를 외쳤다.
연이 떨어진 아이는 집에 잘 계시는 조모를 부르며 울기도 했다.

돈도 귀했지만 종이가 귀할때라 방패연 중에서도 우리 동네에는 '돌가리종이 연' 이라고 돌가루 포대를 찢어 만든 연도 띄웠고, 귀봉사, 치마 당가리, 고리연등 대부분 멋진 그림을 그렸는데, 그 중에도 영호형의 긴고리연이 인상적이었다.
물감이없는 집은 '상주 연'이라고 하얀 맨종이 상테 그대로 띄웠다.

그런데 내 연은 만들어 띄우는것 마다 우째 잘 돌았다.
그런 와중에도 짓궂은 덕권이가 연을 올려 주면서 연 귀에다 실을 한 바뀌 슬그머니 감겨서 올렸던 모양이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바보처럼 개똥 소쿠리가 다 되도록 언 보리밭을 끌고 다녔다.

11
놀구지, 해미당개 뻘밭에서 햇불 봐서 잡은 꽃게와 낙지를 덕조 집에서 삶아 먹는 것을,
용권이와 나는 신작로 길 위에 서서 모가지 길게 빼고 담넘으로 넘겨다 보고만 있었다.
동네 누이들과 다 같이 가기로 했는데, 둘이서 배신때려 다른 동네 처녀 집에서 잠방지기고 놀다가 미안해서 차마 들어가지 못했다.
지금 같으면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또 긴긴 겨울밤 끼리끼리 모여 군밥들을 해먹었는데, 남의 집 껑껑언 김치독과 고추장독을 뒤져오고 아무 남새밭이나 들어가서 마늘, 시금치를 뽑아다 맛있게 무쳐 먹고는, 날 새는 줄 모르고 이불 속에 발 넣고 둘러앉아 `전화치기' 놀이를 했다.
한 번은 점이 아랫방에서 밤새 떠덜고 놀다가 작은방에서 자던 중기형의 몇 번의 경고를 `설마 우리를 어쩌리' 하며 무시해 버렸다.
결국, 보다보다 성질 난 형에게 후다닥 쫓겼는데, 용희, 장도, 용아, 남조, 태종이는 어디로 튀었는지 잘 모르겠고 정희는 봉근영감 논으로 철벅 철벅 기어서 들어갔다.
승환이와 내가 마지막 까지 쫒겼는데, 승환이는 그 긴다리로  의리없이 하둔으로 먼저 뛰어가 버렸다.
나는 어둠을 이용하여 용케 다리 밑으로 숨었는데,  급하게 들어가면서 누군가 싸 놓은 똥을 손으로 짚었다. 어떻게 할 겨를이 없었다
숨은 목구멍까지 찾고 심장은 왕니 방아간 기계소리 모양 꿍꽝 그렸다.
자기도 "제자리방마치 커풀"이면서 좀 봐 주지 않고......

다음 날 점이 아랫방은 구들이 파졌다.

그러는 사이 우리들은  하나 둘씩 군대를 가게 되었는데, 군주를 먹으러 갈 때는 자기들이 먹을 술 (쇠주 댓병과 막걸리 한 통씩)을 매고 다녔다.
술이 얼큰해지면 장그랑 정그렁 장고 소리에 맞쳐서 유행가를 합창해 부르며 마당뛰기를 했고, 한 사람이 유행가 앞 소절을 꺼내 부르면 다른 사람들은 목이 쉬도록  따라 불렀다.
이웃집 젊은 아줌마들도와서는 '새두더기 노는데 헌두더기 라고 못 노나' 하며 같이 어울려 놀았는데,
그때 트위스트, 차차차 같은 춤은 한물가고 막 고고춤이 유행 할 때였다.

양지쪽에서 바구니에 쑥 케 담는 아이들이 간혹 보일 때 면 하둔 영권영감 "덕성호" 소배를 빌려 확성기를 설치하고 인근 섬으로 봄놀이를 갔다.
문입이형 대절선 "올림픽호"를 차다 내어 소매물도 등대에서의 추억과, 호곡 앞 새섬에서의 추억은 다들 오래오래 기억속에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추억들로 인해 내가 군대에 있을 적에 동네 누이동생들이 위문편지를 보내왔는데,
"오빠, 우리들이 뛰놀던 다안등에는 배꽃이 하얗게 피었고, 둑 너머로 불어오는 해풍에 보리밭의 물결은 너무나 아름답구요..." 하고 고향 소식을 전해 왔다.
힘든 훈련 하다가 잠시 쉴 적마다 아스테이지에 곱게 싼 편지들을 꺼내 보았는데,
아쉽게도  내무사열시 서신검열에 걸려 몽땅 뺏기고 말았다.
그 연서 같은 편지를 그때 뺏기지만 않았어도 아마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었을 텐데...

12
끌티기 나무는 석만 형이 크다란 울매로 우리가 선물마친 것 까지 잘도 뽑았고,
그렇게 뽑은 끌티기로 군불을 땐 석권 아랫방은 언제나 절절 끓었다.
나뭇짐 예삐기는 길용이 형이었고, 생솔가지 찍기는 영철이가 원숭이띠 값을 했다.
갈비동은 점선 누님 것이 그중 컸었고, 덕조는 낫 꼽빼기로 나무짐을 꼴 다듬다 세월 다 보냈다.
덩치 치고 짐 많이 지기는 채철이 형이 었는데, 생소나무 석단 지고도 팔팔 날았다.
우리 모두는 끌티기, 생솔켄, 물거리, 거부지기, 모잔가리, 장작, 갈비 등 각자 나무 한 짐씩을 얼른 해다놓고는 갯논 병태논으로 논공 차로 모여들었다.

얼마나 좋았으면 장도형은 자기 집 사리팎을 나올 때 부터 서울서 배운 태권도 두발당상차기로 한번 까고 나왔고, 꼴짝한 형님들은 도구개로 공을 잘 몰았다.
심판도 별 필요 없고 규칙 이래야 `핸들링', `아웃', 정도였다.
후보 선수로는 재용이 영권,  성조, 진구, 병민, 창균, 중근 정도였고, 형들이 제발 불러서 교체해 주기만을 기다렸다.
영길이 덕인이 봉덕이 형렬이 종균이 병섭이는 멀리 날아가는 볼을 서로 경쟁적으로 주우러 다녔다.
덕용, 윤조, 종길, 순종, 병주, 상욱, 영갑, 형철, 용균, 봉삼이 는 너무 어려서 끼일 엄두도 못냈고,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양편에 걸린거라고는 기껏해야 `라면 삶아 먹기' 정도 였다.

13
정월대보름 날 이면 아버지들은 매구패를 꾸몄었다.
제법 그럴싸하게 복장을 갖춰 입고는 당산제를 지내고 지신밟기까지 끝내고는,
집집마다 매구를 쳤는데, 대문앞에 도착하여 "쥔쥔 문여소 문 안 열면 갈라요."하고
상쇠잡이 봉조 할배가 깽수로 리더를 했고 다들 후렴으로 따라했다.

콩딱 쿵딱 마당을 몇 바퀴 돌고나서 봉조 할배의 깽수가 중중모리에서
드디어 휘모리장단으로 바뀔 때쯤 외용이 아버지 벅구놀이는 몸 전체가 기운 팽이처럼 신기하게 돌았고,
성조 아버지 돌려치는 장구는 누가 봐도 멋졌지만 두종이 아버지 종쇠는 몇 년째 제대로 맞는지 안 맞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종구형 아버지는 징을 잘 맞추었고, 술이 얼큰해진 동운이 아버지는 양반역활을 잘도 했다.
포수역활은 장권형 아버지가 주로 맡아 했었다. (광에 들어가 생선 말린것들을 포수가 나무총으로 수입 잡으면,  그것을 보식기에 담긴 쌀과 그 속에 묻어 놓은 약간의 돈을 챙기는 일은 복균이 아버지와 석용이 아버지가 주로 재무역활을 맡아 했었다.)

마지막으로 동네 어르신들이 함깨 어우러져서 마당놀이를 펼쳤는데,
힘든 농사일 하다 언제 갈고 닦았던지 나름대로의 고전무용의 진수를 우리들은 옆에서 다리 옴쫄거리며 지켜보았다.

작은 동네라 한 집안 식구 같았으며 누가 봐도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이제 방답꾸미도 한 세대가 바뀌어가고 있다. 정정하시던 아버지 어머니들이 연세가 높아 거진 다 돌아 가셨다.
그 당시 어렸던 우리가 어느 새 머리 희끗희끗한 중년이 되고 말았다.

아쉽게도 마을 앞  저수지는 경지정리로 흔적도없이 사라졌고, 다안등 돌배나무도 "매미 태풍"으로 인해 한쪽 가지는 그때 부러지고 남은 가지마져도 말라 죽어 마음이 아프다. 보호수라는 간판만 휑덩그라니 서있다.
소먹이던 손골산에는 그렇게 높아 보이던 여우바위가 소나무숲에 가려 보이지도 않고, 공차고 놀던 재목아지 고갯마루는 도로가 포장 되면서 낮아져 아예 없어져 버렸다.
쇠널 선창으로 소금가마니 져 날라 잔돈 벌어먹던 염전은 주인이 서울사람으로 바뀐 지 오래고, 갈대만 무성하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철새들이 보금자리로 한량없이 쓰고 있을 뿐이다.

산다고 바빠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옛날의 추억들을 타임머신을 빌려 타고 한 번 되돌아가 보았다.
꼭 엊그제 있었던 일같이 느껴지건만 벌써 세월이 그렇게도 빨리 강물처럼 흘러가버렸단 말인가?

아! 어릴때의 추억은 누구나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한없이 더 그리워질 뿐인가보다.

 

추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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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현길님의 댓글

김현길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내 고향 방답꾸미 이야기를 시라는 형식을 빌어 회상해 봤습니다.
보시는 분들이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많을 줄 알고 고심하다 올렸습니다.
김현길이라는 사람이 자라고 현재 사는 곳 입니다.
쓸때없이 길어 괜히 시간만 허비 하지나 않았는지...

허혜자님의 댓글

허혜자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그때 그 시절
회상하며 즐겁고 재미있는 좋은 글 잘 감상 했습니다
경남 사투리가 구수하고 진미 풍기는 말 솜씨
꼭 시인님의 마음 같습니다
잘뵈었습니다
건승을 기원 합니다 .

이은영님의 댓글

이은영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동네 여동생들이 보내 준 편지
오빠, 우리들이 뛰놀던 다안등에는 배꽃이 하얗게 피었고, 둑 넘어로 불어오는 해풍에 보리밭의 물결은 너무나 아름답구요..." 를 기억하고 계시다는 건? ㅎ~

김현길 시인님,
이 글 그대로 두지 마시고,
소설로 엮어보시면 어떨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사투리도 쓰시고, 제목도 그대로 두시고,
방답꾸미가 어떤 의미를 지닌 지역명인지에 대해서
의미를 상기하시면서 마지막 마무리만 승화시키면
멋진 소설이 탄생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런데요.
김현길 시인님,
방답꾸미가 정말 무슨 뜻인지요? ^^*

김현길님의 댓글

김현길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허혜자 시인님 보신다고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은영 수필가님 조언 생각해 보겠습니다. 방답꾸미는 방답꿈-방답으로도 불립니다. 지금은 그냥 방답이라고 부릅니다. 임진난때 방답진이있었고,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도 나옵니다. 훗날 여수 돌산으로 진이 옮겨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제때 개막이 공사가 완공되어 농사를 지었는데, 다들 막을 방 논답을 써서 방답인줄 더러는 알고있습니다. 그시절 만든 저수와 염전 유휴지에 철새와 각종고기가 배수문을 통해 들락그렸습니다. 어린시절 부끄럼도 모르고 홀딱벗고 뛰놀았습니다. 갈대숲사이로 달이지는 그곳에 저희 외딴 집이 있습니다.

현항석님의 댓글

현항석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초등학교 때 십리길을 걸어서 통학했는데,,,,,
그 떄의 일 들이 하나 하나 떠오릅니다.
김현길 시인님의 작품속에서 30여년 전의 추억으로 돌아다녀 봅니다,

강분자님의 댓글

강분자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저의 어려웠 던 유년시절이 그립습니다
시인님 반갑습니다

김하영님의 댓글

김하영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그먼엣날어릴적생각나네요닭서리 참외서리 겨울밤 친구들하고
성냥따먹는화투놀이등 엣날생각이새롭게나네요 김현길시인님
그구수한사투리섞여가며소설로내음이어떨지잘보고갑니다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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